92회 아카데미 11개 부문 노미네이트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1. 27. 00:12 posted by jenny-come-lately

 



올해, 극장 관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아야만 언급을 할 수 있기에 '내키지 않아도' 상영 기간에 관람한 두 작품은 [나랏말싸미]와 [조커]이다.

[나랏말싸미]는 불교계 자본으로 불교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비난 받았는데, 

내가 보기에 감독은 불교계에 잠입한 X맨이며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감독이 신미창제설을 진지하게 주장하고 싶었다기엔, 

신미와 승려들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마치 4차원으로의 모험을 꿈꾸는 초딩 5학년이 만들어 낼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장면들을 한글 창제의 과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가야금 소리에 착안한 가획의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등의 장면들 ㅡ,.ㅡ). 

영화는 세종을 슬픈 바보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미와 승려들을 바보개그맨으로 만들어 놓았더라.

따라서 진정한 문제작은 [조커]라고 할 수 있겠다. 

[조커]가 서구에서의 반응과 달리 한국 관람객들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다지 큰 충격은 아니었던 이유는, 

조커의 문제는 진보적인 인사들을 물론 포함하는 WASP들의 가치관을 흔드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민족구성원이 비교적 단일하고 집단주의 문화로써 상황귀인에 익숙하므로 아서 플렉이 반사회적 인물이 된 결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2020년 현재 미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 상류층이 ‘정치적 올바름’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포용적 사회상을 의심하게 만드는데 솔직히, 

인종적이거나 계급적 문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이며 이 문제들 관련 갈등이 진행중이라는 것의 

반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아서 플렉은 분명히 범죄자다. 

아서 플렉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 서구문화인들의 중요한 가치관이다. 

이전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서구문화에서 개인은 자기 행동의 분명한 주체이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경구가 아동과 청소년들이 즐겨보는 코믹스 [스파이더맨]에 교훈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범죄행위를 놓고 미국인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상황귀인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도, 영화에서 아서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 결과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히 아서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잭 니컬슨 조커와 히스 레저 조커를 단죄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매우 지당한 것이었다. 

잭 니컬슨은 폭력을 유희로 삼는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형상화된 악이었고, 

히스 레저는 반사회적인 소시오패스였기 때문이다(영화관객들이 히스 레저 조커를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선망이라는 인지상정 때문이다. 소시오패스 특성을 가진 히스 레저 조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종교적 악이나 반사회적 악하고는 다르다. 

우리는 아서 플렉의 과거를 보면서 그의 현재를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이것은 아서 플렉에 대한 용서나 처벌 여부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주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존재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가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그들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난감한 상황이다. 

영화 [조커]는 그들의 문화에서 큰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OWS시위의 배경과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배경이 많이 닮아있다. 

WASP들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경제문제(분배와 복지)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구로 99%의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폭력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삐딱한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한국의 평론가를 포함한 대다수 관객들이 [조커]를 논란의 작품으로 여기는 데에는, 

우리가 보기에 별로 혼란스럽지 않은 이 영화를 서구인들의 도식에 동조되어 동화하지 못하고, 

조절을 통해 자신들 고유의 도식을 바꾸려 하다보니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커버스토리와는 별개로, 내가 ‘건전한’ 이단으로서 궁금해 하던 질문이 19호에 포함되어 있기에 먼저 읽었다. 
(‘건전한 이단’은 나 자신이 기성 종교를 수용하지 않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라는 의미로써 개인적으로 사용하련다.)

Focus 기사의 제목: <신은 어째서 악을 없애지 않는가>
도입부: 2019년 2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있는 남부복음주의신학교에서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인가?’를 주제로 절제된 토론이 열렸다.


토론자:
마이클 셔머;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다
브라이언 허플링; 악은 신의 존재와 무관하다

토론 중에 허플링 박사는 글로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그 글을 통해 셔머와 허플링이 동의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악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도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유에 근거하지만,).
- 도덕은 객관적이다.

글로 나눈 의견들 중 셔머는 허플링에게 ‘왜 신은 소아 백혈병을 고쳐주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제시하였다. 

허플링은 ‘신의 선악은 인간의 가치와 기준과 다르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다’는 취지로 답을 하였고,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명제를 전제로 제시하였는데,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선함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이것은 전제이기 때문에 허플링은 그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논리의 출발로 삼았다.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들은 ‘존재에 절대 존재하는 어떤 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신 뿐일 것이다.

허플링이 신의 전지한 부분과 의지를 인간이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허플링은 존재가 선한 부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논박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신을 알 수 없다면-신의 일부인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신의 율법을 알 수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현재 각 종교에서 신도나 인간들에게 제시하는 규율이나 가치가 신의 그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내가 신을 믿지 않거나 내 맘대로 추종하는 것이 신의 뜻과 어긋난다는 것을

‘인간’인 신도들은 나에게 증명은 커녕 설명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허플링은 악이, 신이 존재시킨 것이라기보다 ‘선한 존재의 타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한 존재의 타락’은 신의 뜻이 아닌데 발생한 현상이다.

이는, 신 외에 다른 능력의 무엇이 존재하거나, 신은 완벽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타락 또한 신의 뜻이라는 논리가 된다.

허플링은 신과 악의 문제를 물리적 현상을 다루는 학문의 관점이 아니라 철학의 관점에서 다루길 원했고

나도 간단하게 철학적 의문을 제기하였다-선의 타락은 신의 의지인가?

 

인간이 ‘알 수 없는 완벽한 존재’를 사유하고 고찰할 수 있지만,

물리과학이 아닌 철학에서조차 '그렇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겸손해야 할 것이다.


반백살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1. 1. 23:14 posted by jenny-come-lately

 

너무 바쁘게 살아온 편이라서 스쳐지나는 시간을 제대로 음미할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노화에는 능숙하게 적응해가는 중이며 이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아주 천천히라도 시작해야 하는 때에 이르렀다고 본다.

가장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그 시기가 몇 년 후가 되든지 간에 머지 않아 다가올 하나뿐인 가족인 모친의 부재 상황에 대한 대비이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이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20여년 전 동생의 죽음과 7년 전 부친의 죽음 둘 다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모친은 눈에 띄게 인지력과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마 노화로 삶을 마무리하시고 따라서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한다.

나도 가족의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그리고 극복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간의 경험들에 대하여 매우 침착하고 안정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여 과거와 기억으로 수납시켰으나,

솔직히, 극복했다는 100%의 확신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나에겐 그 기회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말 즈음에 발생한 소소한 운들은 내게 그 힘을 아주 조금은 보태주었다.

삶은 (적어도 나에게는, 구차하게라도) 살아진다.

어떤 해의 1월 1일에는 영화를 보게 되는 때가 있는데 오늘은 [포드 v 페라리]를 MX관에서 조조로 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주 멀쩡한 신체와 중간 이상 되는 정신뿐이 없는 내가 스스로에게 구차함을 덜어주는 요령들 중 하나는 켄 마일스의 여유와 과감함일 수 있다.

아 나...  배우 크리스찬 베일 팬 되야하는 거야?

 

2019년 자축 : 그 따구로 쫓기면서 '조금만' 부끄러운 학위과정을 마침. 

2020년 바램 : 부족한 공부를 웹컨텐츠 제작을 이용, 조금이라도 보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