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입법, 사법 및 행정의 3권 분립 원칙에서 기능한다.
- 행정부의 책임과 권한 중 하나는 입법부에서 제정된 법을 “집행”하고 법을 어긴 자를 수사하여, 사법부에게 공정한 재판절차를 통해 위법과 그에 맞는 구형의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 검사는 행정부의 법무부 소속 ‘공무원’이다.
- 공무원은 행정부 소속으로 해당 정부로부터 하달된 정책 기조에 맞추어 일을 하게 된다.
- 정부가 특히 어떤 정책기조를 가지고 어떤 범죄를 중요시할 것인지에 따라 검사나 경찰들이 집중하는 범죄 분야가 달라질 수 있다.; [범죄와의 전쟁], 외환위기 후 금융관련 범죄, 최근 촛불집회 이후 공직자 비리나 부패 범죄 등, 해당 정부의 행정 목표에 따라 집중하는 범죄분야가 다르게 부각되는 것이다.
- 이번 정책기조는 어이없게도 정부가 아닌 징계먹은 윤총장이 정했다; 코로나 사태에 영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을 고려해 형사법 구형 수위를 최소화 하라 - 정책기조랍시고, '범죄를 봐줘라'라면서 말이다.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 내용으로....  윤석열은 공부는 안하고 너무 술만 마셔댔나 보다.

- 재판 절차에서 행정부 중 법집행 기관인 법무부 소속인 검사는 위법을 증명하고, 기소된 피의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고자 ‘무혐의를 주장’(‘무죄 입.증.’이 아닌)하거나 과중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재판정에서 변호사를 통해 변론을 하게 된다.
- 재판 절차는 전문 영역이다.
- 이 과정에 위법을 증명해야 하는 검사는 정부-법무부를 대리하고, 피소인은 변호사를 그 대리인으로 지명하게 된다.

이를 종합하면 검사는 재판과정에서 정부를 대신하여 위법을 증명하는 일을 하는, 정부의 법조대리인이다.
이들의 주 업무는 “직접”수사가 아니며 “형사” 사건의 범위에서만 소를 제기(기소)할 수 있는 한정된 임무를 부여받은 공무원이다.
정부의 법조대리인으로서 위법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고자 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사실 ‘수사 요청’이 맞을 것임)를 할 수는 있지만 “직접”수사하는 것은, ‘정부를 대리하여 재판에 임’하는 취지에 맞지 않으며, 맡은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권력을 갖게 될 수 있다(수사의 역할은 경찰이 하고 있다).
기소독점과 기소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권력이 집중된다.; 기소독점 – 현재 형사 사건에 대한 소는 오로지 ‘검사’만 제기할 수 있다(경찰은 못하게 되어 있다). 기소편의 – 검사가 기소를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할 수 있다. → 즉, 검사 마음대로 피의자를 봐주거나 족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져 직접수사까지 하게 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검사는 갖게 되며,
이는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본질인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한국의 실정이다.

이쯤에서 검사의 독립과 외압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떤 의미인지 정리할 수 있다.
- 정부의 정책기조에 따라 특정 범죄에 집중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외압이 될 수 없다.
- 검사에 대한 외압이란, 정책기조(정책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정책이라는 것이 전제되었다는 가정 하에)에 반하거나 또는, 사적으로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기소과정이나 재판절차에서 강요 및 강제가 발생하는 경우일 것이다.
- 검사는 이런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검사의 독립의 의미일 것이다.
- 즉, 별건 수사를 하거나 피의자 내지 피소자를 겁박하거나 회유하여 검사 자신이 못마땅해 하는 대상에 혐의를 조작하거나 덧씌우는 것이 독립은 아니라는 것이다.
- 지금 한국의 검사들 일부는 독립을 빙자하여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
- 이에 일정기간이나마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공수처가 필요하게 된 상황이다.

변호사 소재의 영화는 많지만 검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응원하는 배드테이스트팀이 올해 넷플릭스 최고의 영화로 꼽은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 소신 있는 법무부 소속 검사가 어떤 모습인지 약간 참고할 수 있다. 
리처드 슐츠 검사는 기계라고 할 정도로 원칙적이다. 
7명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맞지만, 법의 취지와 그들의 행위는 관련성이 없었으며 사건과 관련 없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재판에 나서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법무부장관이 위법인 것을 알면 그에 맞는 재판을 하라고 명령하고 마지못해 따른다. 
그리고 슐츠는 자신만의 가치관(보수적인)이 있으면서 동시에 
사건과 재판을 법, 사회, 문화 및 정치적 관점 등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매우 개관적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법과 양심에 충실함은 물론 양심을 지킬 수 있는 범위에서는 심지어 명령에도 충실하며 재판에 임한다. 
반대편 피소자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원칙적이고 냉철하며 예의바르게 대하는데 그 와중에 여전히 검사의 본분을 지킨다.

- 검찰에게 지나치게 편파적인 언론(이기를 포기한 찌라시)들이 공수처가 세계적 유례가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지만, 현재 한국의 검찰 역시 세계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위험한 권력을 갖고 있는 기형적 조직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 검찰총장의 징계 수위에 대하여; 
종종 동양사회에서 우두머리에 대한 상징과 가치가 전근대적으로 구현되어 어이없을 때가 있다. 

정치판이나 다른 조직에서는 우두머리가 부정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법이 ‘사퇴’이다. 

윤석열 총장에 내린 징계위원회의 의도처럼 ‘봐주기’나 ‘수호’는 사실 ‘종교’의 사제들의 경우에서나 나타나며, 

궁극의 신 자체는 결국은 다들 자신의 존재자체를 ‘희생’한다. 신들이 인간을 품기 위한 최종 선택이자 방법이다. 

정치인들의 사퇴가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유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윤석열은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처럼 취급받았다-불쌍타. 

징계위원회는 타의 모범을 보여야하는 자리에 있는 우두머리의 책임에 대한 판단을 회피하였으며, 

윤석열은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찌질함의 극치를 보였다. 자신은 검찰조직을 지키기 위한 소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범법도 하고 찌질해지기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한 양반이지만, 뒤틀리고 비뚤어진 신념이 한심하다.

참여연대의 삽질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11. 28. 22:04 posted by jenny-come-lately

우선, 3년째 운영위원임을 밝힘(별 한 일은 없지만, 늘 관심을 가지고 의결에 참여하였음).

 

 

참여연대 측에서는 검사징계법과 검찰청법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성명서를 낸 것일까?

[검사징계법 8조]

제8조(징계혐의자에 대한 부본 송달과 직무정지)

① 위원회는 징계청구서의 부본(副本)을 징계혐의자에게 송달하여야 한다.
② 법무부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징계혐의자에게 직무 집행의 정지를 명할 수 있다.
③ 검찰총장은 해임, 면직 또는 정직 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되는 사유로 조사 중인 검사에 대하여 징계청구가 예상되고, 그 검사가 직무 집행을 계속하는 것이 현저하게 부적절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법무부장관에게 그 검사의 직무 집행을 정지하도록 명하여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이 경우 법무부장관은 그 요청이 타당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2개월의 범위에서 직무 집행의 정지를 명하여야 한다. <개정 2016. 1. 6.>
④ 법무부장관은 제2항 또는 제3항에 따라 직무 집행이 정지된 검사에 대하여, 공정한 조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2개월의 범위에서 다른 검찰청이나 법무행정 조사ㆍ연구를 담당하는 법무부 소속 기관에서 대기하도록 명할 수 있다. <신설 2016. 1. 6.>
[전문개정 2009. 11. 2.]

참여연대측에서 인정하고 판단한대로,

윤총장은 심각한 중대한 그리고 거의 충분히 불법으로 판단될 만한 "여.러." 문제적 행위를 저질렀고,
감찰도 거부하였으며,

심지어 정치행위까지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얼.마.나. 잘못해야 검사징계법 8조 2항이 가동되는가!?

그리고 장관이 지휘할 수 있는데 왜 대통령이 장관의 명백한 고유권한에 개입하는가?

조국사태 때에도 대통령은 개입하지 않았었다.

또한, 만일 우리 참여연대가 검찰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할 어떤 입장이나 주요 인사와 함께 하고 있어서
검찰 눈치를 봐야하는 거라면 차.라.리!
성명을 내지를 마시라!!

 

개인적인 생각으로, 윤총장에게는 민주주의 살해혐의를 두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어머니, 노화로 인하여 편찮으신 증세가 몸 여기저기서 하나 둘 씩 나타나고 있는 와중,

동네 의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소견으로 폐결절이 있으니 전문의 진단이 필요하단다.

1차 의료기관과 2차3차의료기관의 짝짜궁이가 의심되는 경우도 많아 영상을 봐도 신뢰가 가지 않지만 확인은 해야했다.

의료진단의 의심 계기는 폭증했던 갑상선암 진단과 수술 통계인데, 이 수치의 불순함은 이제 의심할 나위가 없이 권위 있는 의사들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핸들을 틀어, 병원이나 의원 규모에 상관없이 늘 당연한 듯 대기시간이 길고, 서 너 번의 병원 방문 중에 그 막간을 이용하여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이 작품에는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이 적.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간은 객관적 존재로서는 한낱 미물이며 동시에 주체적으로는 위대한 생명체라는 점이다.

인간의 모순된 여러가지 특성에 대한 표현들이 경이롭게 어우러져 있어서, 

이 소설이 다소 마초적인데가 있을 지라도 좋은 작품이라는 것에 수긍이 된다.

 

'과연 인간들이 저고기를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아니야, 물론 자격이 없어. 저렇게도 당당하고, 위엄 있는 저 놈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야.'

"함께 놀고 장난치고, 샘 날 정도로 사랑도 하지. 저 녀석들은 날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나 마찬가지야."

 

노인은 고독과 불안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현실을 인정하며,

자신 외의 나머지 자연에 대하여 경외와 동시에 극복의 의지를 내비치며 갈등한다.

갈등은 풀렸다 묶였다를 반복하며 노인을 힘들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지는 아름답게 결정화되어 간다.

작품에서는 자연도 노인도 모두 숭고함 그 자체이다.

자연은 존재 자체로 숭고하며, 노인의 경우는 갈등 속에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어하여 불안 속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라는 유한의 존재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는 초연하기가 매우 어렵다.

불안과 고독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대상(바다 속의 커다란 어떤 고기)에 대한 분석을 침착하게 할 수 있는

노인의 초연함을 뒷받침하는 것은 평생 어부로 살아온 노련함이었겠다.

그럼에도 노인이 처한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열악하여 침착하고 초연하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빈약하고 불균형한 영양 섭취, 상처와 피로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도 고기와의 사투를 빨리 끝내려고 조바심내지 않고 인내한다.

싸움을 빨리 끝내고픈 성급한 마음에 고기를 험하고 가혹하게 다루면 엄청난 힘의 고기가 격렬하게 반응하여 노인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상황임을 노인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 인간들이 탐욕의 성취나 고통의 해결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을 자제해야하는 근원적 이유를 제시한다.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다뤄지지 않으며, 멋대로의 취급은 자신에게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노인의 갈등은 자신의 직업인 고기를 잡고 결과적으로 죽여야만 하는 것에 대한 성찰의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다른 포식자들처럼 주변의 것을 파괴하여 생명을 이어갈 수 뿐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파괴행위를 정당하게 여겨 몰염치하기 보다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복합적 숙고의 과정을 신의 시험처럼 거쳐야 하며

그 결과, 자신이 파괴한 존재들을 경외하며 겸손한 답을 얻어야 천박한 생명체로 그치지 않고 노인처럼 홀로라도 존엄해질 수 있다. 

생각하고 철학을 할 줄 안다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상실하지 않고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고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노인과 바다] 외에 ♣ 생태주의 작품 몇 개 ♣ 이면서 매우 좋아하는 작품들

 

마지막 유니콘 ; 미국 애니메이션 ; 밴드 아메리카의 the Last Unicorn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거신병이 타노스?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 독일 영화 ; 엠마는 착한 타노스?
청의 6호 ; 종말을 획책한 타노스 캐릭터의 박사 등장
환경전사 젠타포스 ; 못 봤으나 재미있어 할 것 같음 ㅡ,.ㅡ;;;

 

 

지난 6월에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님이 그리워 진다. 

선생님은 급진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셨다. 생태문제를 급진적으로라도 비판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전혀 지나치지 않다.

선생님은 종착지에 계시다시피한 상징이셨고, 우리는 종착지로 가는 길에 들어선 적도 없으면서 엄살과 원망을 했었다.

선생님의 철학은 목적이어서 고민하지 않으셨을 것 같고, 방법은 많이 고민하셨을 것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선생님의 철학을 목적이 아닌 방법으로 여겨서 비난 혹은 비판하였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2020. 11. 28. 주술호응 수정 

사고 실험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6. 7. 23:19 posted by jenny-come-lately

 

사고 실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물리』 실행 가능성이나 입증 가능성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사고상으로만 성립되는 실험. 하나의 이론 체계 안에서의 연역 추리의 보조 수단으로 쓴다. 예를 들면,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다루기 위하여 생각되는 전자의 위치 측정 실험 같은 것이다.

홍보문에서 낚인 부분 – 평범한 생활을 한 사람이 혼자 생각하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자율주행차는 보행자 또는 차량탑승자 둘 중 누구를 살려야 합당할까? 과정과 기회와 결과의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중에 무엇이 더 우선시되어야 할까? ’

 


라플라스의 악마 : 라플라스는 물리법칙을 지나치게 신봉하였다고 생각된다. 

책에서는 라플라스의 주장이 ‘신의 전능성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 염려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전제가 ‘현재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을 경우’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공간과 시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저장을 위한 공간은 그렇다 치고, 

그 정보를 가지고 계산하는 시간 동안 그 시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현재’는 흘러가 버린다. 이 지점에서야말로 

제논의 역설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쨌든 결국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인해 라플라스의 주장은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여러 가지 사고실험들이 흥미로웠는데, 과학의 몇몇 사고실험처럼 어느 정도 해답이 발견된 문제와 달리, 

복잡한 상황과 가치관 때문에 아직 논쟁 중인 문제들로, 대체로 PARTⅢ과 PARTⅤ에 제시된 사고실험들이 특히 그러했다. 

그 중 낙태에 대한 나 개인의 의견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내용들에 대하여 아래에 잠깐 다룬다.

 

 

작년 4월 헌재는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며 세계적으로는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 

불법이거나 합법으로 낙태 허용여부에 대한 초국가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낙태 허용-반대 주장의 정당성 근거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낙태를 반대하는 토론자들은 낙태 수술 동영상을 제시하면서 태아의 생명권을 생각하면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므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태아가 어느 지점부터 생명권을 부여받는지를 결정하면, 그 지점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인데, 

대체로는 임신 22주기가 경계지점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태아가 모체와 분리하여 독자적 생존 가능성이 있는 임신 주기가 약 22주이기 때문이다.

 

임신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거치고 자궁에 착상 후 모체로부터 영양공급을 받아 태아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임신과 출산이 경이롭고 고귀한 과정인 것은 명백하며 이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은 철학적 의식이 있는 복잡한 생물인 점 또한 명백하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점이 

임신과 출산이 가진 본래의 긍정성을 상실할 수 있게 만든다.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들의 정신상태는 사지절단 욕구를 제외하면 극히 정상이며

절단한 후에는 심리적 고통이 사라졌고 삶이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정신의학에서 신체통합정체성장애 증상을 가진 환자로 분류·진단되고 있다.

개안 수술을 거부하는 평생 맹인으로 살아온 노인이나 개인적인 허영으로 성형수술을 원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거나 진단 될 수는 있다.

그리하여, 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지 않.는. 상황이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낙태허용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의 몸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이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것은 아니라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상황의 어느 지점에서 객체들은 주체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강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윤리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점이나 경우가 어디이고 어떤 때인지 합의해야 한다.

적어도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비례연합정당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3. 26. 00:17 posted by jenny-come-lately

 

 

 

이번 연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모든 비례를 포기하면 멋질 거라고 생각하였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이익은 커녕 자신의 몫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숭고한 행위이며 공감과 지지를 얻기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호의존적이고 집단주의적 문화의 한국인들은 아마도 보수층까지 제법 감동하여 특이한 선거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시뮬레이션으로 계산된 비례 의석수 7~8석보다 오히려 많이 차지하고자 하는 정략으로 비겁한 짓을 하였다.

비례연합 정당에 참여할 것이지만 '성 소수자나 이념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당과는 연합할 수 없다'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즉, 녹색당이나 노동이슈 정당과는 연합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게다가 하승수  정치개혁연합 집행위원장은 굴욕적이게도 주변 인사들로부터 민주당이 이미,

여러 민주계 인사들이 참여하고 하승수위원장이 실무진으로서 제안한 집단과의 연합이 아닌

더불어시민당으로 연합을 결정하였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고, 민주당이 개문발차한다더니 발차하자마자 폐문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하승수 위원장이 양정철이라는 한 사람을 겨냥한 상황에 대한 비난이 있는데,

사실 행간을 보면 하위원장은 적어도 중도진보 진영의 분열을 막기위해 '민주당'을 가리켜야하는 것을 인내하여 지양하며

'양정철'에 한정하여 책임의 범위를 축소시킨 사려깊은 우아한 공격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 입장을 모르는체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분노의 궁금증이 증폭되려고 한다.

그리고 양정철은 애초에 그러한 총알받이로 자처하는 인사이고, 민주당과 양정철 개인은 합의되어 있는 관계라는 것을

나같은 필부의 눈에도 뻔히 파악되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그지지자들은 하위원장의 폭로를 비판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애초에 자기집단의 "쫀심"만 중요하게 여기고 대의를 보지 못한

정의당과 우리 녹색당의 연합정당 거부라는 선택에 대한 분노 또한 어렵게 다스려야 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의 독야청청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면 입산하여 속세와 단절하면 될 일이다.

그 잘나신 고고함에는 자신 혼자만 만족하면 그만일텐데 왜 속세에들 계시나.

이전에도 언급한적 있지만 세상은 자신이 주인공만을 할 수는 없다. 더 많은 경우에 각자는 조연을 더 많이 맡게 된다.

 

 

 

92회 아카데미 11개 부문 노미네이트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1. 27. 00:12 posted by jenny-come-lately

 



올해, 극장 관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아야만 언급을 할 수 있기에 '내키지 않아도' 상영 기간에 관람한 두 작품은 [나랏말싸미]와 [조커]이다.

[나랏말싸미]는 불교계 자본으로 불교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비난 받았는데, 

내가 보기에 감독은 불교계에 잠입한 X맨이며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감독이 신미창제설을 진지하게 주장하고 싶었다기엔, 

신미와 승려들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마치 4차원으로의 모험을 꿈꾸는 초딩 5학년이 만들어 낼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장면들을 한글 창제의 과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가야금 소리에 착안한 가획의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등의 장면들 ㅡ,.ㅡ). 

영화는 세종을 슬픈 바보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미와 승려들을 바보개그맨으로 만들어 놓았더라.

따라서 진정한 문제작은 [조커]라고 할 수 있겠다. 

[조커]가 서구에서의 반응과 달리 한국 관람객들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다지 큰 충격은 아니었던 이유는, 

조커의 문제는 진보적인 인사들을 물론 포함하는 WASP들의 가치관을 흔드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민족구성원이 비교적 단일하고 집단주의 문화로써 상황귀인에 익숙하므로 아서 플렉이 반사회적 인물이 된 결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2020년 현재 미국이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 상류층이 ‘정치적 올바름’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포용적 사회상을 의심하게 만드는데 솔직히, 

인종적이거나 계급적 문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되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이며 이 문제들 관련 갈등이 진행중이라는 것의 

반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아서 플렉은 분명히 범죄자다. 

아서 플렉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 서구문화인들의 중요한 가치관이다. 

이전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서구문화에서 개인은 자기 행동의 분명한 주체이며 행동에 대한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경구가 아동과 청소년들이 즐겨보는 코믹스 [스파이더맨]에 교훈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범죄행위를 놓고 미국인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상황귀인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도, 영화에서 아서가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 결과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히 아서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잭 니컬슨 조커와 히스 레저 조커를 단죄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매우 지당한 것이었다. 

잭 니컬슨은 폭력을 유희로 삼는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형상화된 악이었고, 

히스 레저는 반사회적인 소시오패스였기 때문이다(영화관객들이 히스 레저 조커를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선망이라는 인지상정 때문이다. 소시오패스 특성을 가진 히스 레저 조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종교적 악이나 반사회적 악하고는 다르다. 

우리는 아서 플렉의 과거를 보면서 그의 현재를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이것은 아서 플렉에 대한 용서나 처벌 여부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주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존재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가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그들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난감한 상황이다. 

영화 [조커]는 그들의 문화에서 큰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OWS시위의 배경과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배경이 많이 닮아있다. 

WASP들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경제문제(분배와 복지)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구로 99%의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폭력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삐딱한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한국의 평론가를 포함한 대다수 관객들이 [조커]를 논란의 작품으로 여기는 데에는, 

우리가 보기에 별로 혼란스럽지 않은 이 영화를 서구인들의 도식에 동조되어 동화하지 못하고, 

조절을 통해 자신들 고유의 도식을 바꾸려 하다보니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커버스토리와는 별개로, 내가 ‘건전한’ 이단으로서 궁금해 하던 질문이 19호에 포함되어 있기에 먼저 읽었다. 
(‘건전한 이단’은 나 자신이 기성 종교를 수용하지 않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라는 의미로써 개인적으로 사용하련다.)

Focus 기사의 제목: <신은 어째서 악을 없애지 않는가>
도입부: 2019년 2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있는 남부복음주의신학교에서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인가?’를 주제로 절제된 토론이 열렸다.


토론자:
마이클 셔머;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다
브라이언 허플링; 악은 신의 존재와 무관하다

토론 중에 허플링 박사는 글로 의견을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그 글을 통해 셔머와 허플링이 동의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악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도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유에 근거하지만,).
- 도덕은 객관적이다.

글로 나눈 의견들 중 셔머는 허플링에게 ‘왜 신은 소아 백혈병을 고쳐주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제시하였다. 

허플링은 ‘신의 선악은 인간의 가치와 기준과 다르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다’는 취지로 답을 하였고,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명제를 전제로 제시하였는데,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선함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이것은 전제이기 때문에 허플링은 그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논리의 출발로 삼았다.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들은 ‘존재에 절대 존재하는 어떤 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신 뿐일 것이다.

허플링이 신의 전지한 부분과 의지를 인간이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허플링은 존재가 선한 부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논박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신을 알 수 없다면-신의 일부인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신의 율법을 알 수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현재 각 종교에서 신도나 인간들에게 제시하는 규율이나 가치가 신의 그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내가 신을 믿지 않거나 내 맘대로 추종하는 것이 신의 뜻과 어긋난다는 것을

‘인간’인 신도들은 나에게 증명은 커녕 설명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허플링은 악이, 신이 존재시킨 것이라기보다 ‘선한 존재의 타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한 존재의 타락’은 신의 뜻이 아닌데 발생한 현상이다.

이는, 신 외에 다른 능력의 무엇이 존재하거나, 신은 완벽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타락 또한 신의 뜻이라는 논리가 된다.

허플링은 신과 악의 문제를 물리적 현상을 다루는 학문의 관점이 아니라 철학의 관점에서 다루길 원했고

나도 간단하게 철학적 의문을 제기하였다-선의 타락은 신의 의지인가?

 

인간이 ‘알 수 없는 완벽한 존재’를 사유하고 고찰할 수 있지만,

물리과학이 아닌 철학에서조차 '그렇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겸손해야 할 것이다.


반백살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20. 1. 1. 23:14 posted by jenny-come-lately

 

너무 바쁘게 살아온 편이라서 스쳐지나는 시간을 제대로 음미할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노화에는 능숙하게 적응해가는 중이며 이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아주 천천히라도 시작해야 하는 때에 이르렀다고 본다.

가장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그 시기가 몇 년 후가 되든지 간에 머지 않아 다가올 하나뿐인 가족인 모친의 부재 상황에 대한 대비이다.

그동안 어처구니 없이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20여년 전 동생의 죽음과 7년 전 부친의 죽음 둘 다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모친은 눈에 띄게 인지력과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마 노화로 삶을 마무리하시고 따라서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한다.

나도 가족의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그리고 극복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간의 경험들에 대하여 매우 침착하고 안정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여 과거와 기억으로 수납시켰으나,

솔직히, 극복했다는 100%의 확신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나에겐 그 기회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말 즈음에 발생한 소소한 운들은 내게 그 힘을 아주 조금은 보태주었다.

삶은 (적어도 나에게는, 구차하게라도) 살아진다.

어떤 해의 1월 1일에는 영화를 보게 되는 때가 있는데 오늘은 [포드 v 페라리]를 MX관에서 조조로 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주 멀쩡한 신체와 중간 이상 되는 정신뿐이 없는 내가 스스로에게 구차함을 덜어주는 요령들 중 하나는 켄 마일스의 여유와 과감함일 수 있다.

아 나...  배우 크리스찬 베일 팬 되야하는 거야?

 

2019년 자축 : 그 따구로 쫓기면서 '조금만' 부끄러운 학위과정을 마침. 

2020년 바램 : 부족한 공부를 웹컨텐츠 제작을 이용, 조금이라도 보충.

[스티그마] 어빙 고프만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10. 22. 20:20 posted by jenny-come-lately

 

친여권 지지자나 평론가들 중 일부가 조국 전장관의 가족을 “가족 사기단”으로 치부하고 비난을 하는 현상이 이채롭게 여겨져 재작년에 사두었던 [스티그마]를 읽을 기회로 여기고 집어들었다. 조국장관 가족에 대한 비난은 두 가지 면에서 이채로웠는데, 하나는 사태의 초기에 즉, 매우 일찌감치 가족들에게 낙인을 찍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한 수사와 엉터리 기사가 난무하여도 다른 가능성은 배제되고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낙인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스티그마]는 낙인이 ‘이미 이루어진’ 상황에서 피낙인자와 일반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떠한지 설명하고 있었다. 낙인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책에서는 그러한 낙인 중 “장애”인들이 주변과 소통하는 질적 사례를 자세히 고찰하였다. 피낙인자가 소수자로 대우나 취급을 받을 때, 주변의 사람이나 대중에게 낙인을 은폐할 때 및 공개할 때 피낙인자와 상대방(들) 사이에 연출되는 고유한 장면들이 소개되고 설명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면들이 나에게는 그다지 새롭거나 낯설지 않았다. 고맥락적 동양사회인 한국에서 흔하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상호작용과 그렇게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서구사회가 개인주의적인 사회라면 한국은 집단주의 사회에 속하며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낙인과 같이 불명예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그저 좀 ‘다르다’라는 것만으로도 상호작용의 흐름에 부하가 걸리게 마련이며 이런 사례는 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스티그마]는 내가 궁금해 했던 현상을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낙인 이론’ 포스팅이나 정보를 잠깐 찾아보았다. 낙인은 취약한 소수자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낙인을 찍는 주체의 어떤 ‘욕구’나 ‘감정’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낙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전적으로 ‘선택성의 오류(선입관, 행동에 대한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 투사의 오류)’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제안되는 모양인데, 이 오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욕구나 감정이다. 지지자나 평론가들은 콤플렉스를 느꼈거나 실망으로 분노했다. 콤플렉스나 분노는 다른 정보들(언론의 기사들)의 비논리성과 불합리한 잔인성을 포착하지 못하였고 확증편향을 가져왔다. 이들이 자신들의 콤플렉스와 분노를 회복시키는 게 먼저일 수뿐이 없었던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통해, 확증편향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치명적으로 위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윤석열 총장을 위한 변명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9. 10. 23:28 posted by jenny-come-lately

 

 

국정농단 특검 당시 박영수 특검은, 윤석열 검사를 파견 요청하면서 
‘윤석열이 일단 거절하였지만 그 사람도 검사다. 불의를 수사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을 것’
이라고 하였다.


이전부터 윤석열 검사는 소신대로 수사하여 좌천성 인사를 당하기도 하였고,
짧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법을 지키지 못한(혹은 않은) 의뢰인들의 변호가 체질에 맞지 않아 복귀하였던 인물이다.
결혼이 늦어질 정도로 검사일에 열중하였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통장 잔고가 내내 가벼웠던 사람이다.

또한 “보복수사? 검사가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깡패지 검사냐.”라고 특검에 합류하며 의견을 밝혔다.
이 말에는 윤석열 총장의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 담겨있고,
그 가치관이 훌륭하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삶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조국 사태와 관련하여 집중 포화에 대하여 신중했다고 본다.

그는 침착함과 인내심을 보이다가 어제 대검 간부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되면 부패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현재 윤석열 총장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모호하고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하면 윤석열 총장은 

이번 조국장관 관련 검사측의 전광석화같은 과잉 대응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조국 장관이 검찰 개혁에 대하여 “공적인” 마인드로 소신을 갖고 있듯이, 
윤석열 총장 또한 검사의 일에 대한 숭고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인식이 저열하지 않다.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대하여 그 일의 본질을 벗어나는 사람은 
그 일의 가치를 분별있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고 봐야한다.
이 분별없는 사람들 중 김기춘이나 황교안 같은 검사들이 있는 것이고,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검사의 본분을 다하여 떳떳하게 살았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불쌍하게도 현실은 검사라는 직무에 먹칠을 한 장본인들이라는 것이 대중의 인식이다.

 

나는 윤석열 총장이 이런 인간들과는 수평적으로도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위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윤석열 총장은 검사 조직에 여전히 남아있는 정치검사들을 마뜩찮게 여기고 있으며
이들을 청소하여 조직을 정화시키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장관의 주변인들의 행위에 대한 의혹이 불거져 수사를 하는 것에 대하여
윤석열 총장은 당연히 간섭하지 않는다. 
그는 보스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아래 후배들이 하는 일이 못마땅해도 일단은 일일이 참견하고 쪼잔하게 지휘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정치검사 후배들의 과오-정치적 편향이 밝혀지면 가차없이 엄벌할 것이다.
그들이 정치적 수사를 통해 자신이 숭고하게 여기는 검사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므로...

 

어제 간부들과 밥 먹으면서 ‘검사의 정치적 편향은 부패’라고 한 것은,
후배들이 “정치”적 판단으로 수사를 하였다면 “부패”한 것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로 봐도 무방하다.
보복 수사하는 검사는 깡패이며, 정치적 편향의 수사는 검사의 부패다
-라는 당연한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스스로 매우 낯간지러웠을 테지만,
그 행위들(피의 사실 공표 등)은 부패 행위이기 때문에 

이제는 제동을 걸고 정치검사들에게 경고를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시사평론가들이 이점을 짚어주지 않아서 매우 답답해 하던 차,

어느 유투버가 내 생각과 유사한 입장을 업로드 하였길래

같이 묻어가는 겸 반드시 몇 자 적어야겠다는 마음에.

 

 

 

  1. Commented by jenny-come-lately at 2019.10.22 20:16 신고

    윤석열 총장 국정감사를 보고 : 검찰 주위에는 어떤 결계 같은 것이 있었구만.... 씁쓸.....

  2. Commented by 인우 at 2019.10.26 10:48

    님 글이 명쾌해서 쭉 보고 있는데 의외네요.
    국감에서 자기가 직접 수사지휘했다고 밝혔는데
    뭘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지.
    지금까지 보여준 윤석열은 철학도 인권의식도 없는
    인간이 권력을 쥐게 되면 남용에 따른 폐해만 쌓일 뿐이라고 온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
    세치 혀만 나불 댈뿐.

    • Commented by 인우 at 2019.10.26 10:52

      아. . .한 달 전에 쓴 글이군요.ㅎ

    • Commented by jenny-come-lately at 2019.10.26 13:09 신고

      한 달도 훨씬 이전(45일 전)에 가졌던 희망이죠. ;;;
      결과적으로 제가 착각했던 윤총장의 "소신"은 매우 한정된 것이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법과 원칙"은 시야가 좁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적용하는 듯 합니다. 검사들의 대장은 될 수 있을 지언정,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직의 일원으로서의 자각은 못하는 모양입니다.
      1. 검찰 총장은 이미 검찰 전체를 대표하므로 검찰총장에 대한 기자의 의혹은 검찰 전체의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한겨레 기자를 고발했네요. 그럼 자신은,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 청문회 중에 장관 배우자를 기소하는 것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위신과 권한을 모욕한 것이라는 해석은 안하나요?(수사는 이후에 언제라도 할 수 있고, 의혹이 농후하면 사퇴해도 되는 것인데 말이죠.)
      그것도 위신 떨어지게(채신머리 없이) "경찰"도 아니고 "검찰"에 고소했다면서요?
      2. 계엄령 관련 불기소처분결정서에 찍힌 윤총장이 당시 지검장일 때의 직인이 "관행"이라면, 동양대 표창장의 총장 직인도 "관행"으로 업무담당자가 찍을 수 있습니다. 내로남불이네요.
      그리고 보고를 받았네, 못받았네, 양식이 맞네 틀리네 - 가 중요한 게 아니죠. 수도권 내 1~2천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계엄"문제입니다. 민주당 이인영 대표가 요구한 "수사재개"에 대한 입장을 표하는 것이 총장과 대검의 지위와 규모에 걸맞는 반응입니다. 정말 이 검찰집단은 속이 좁은 조직이네요. 화가 납니다.

법무부 장관 지명 이후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9. 4. 01:10 posted by jenny-come-lately

 

 

나는 누군가가 한 말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동생 4명에게 “내 목걸이 봤어?”라고 물었을 때, 4명 각자가 모두 “모르겠어.” 라고 대답한다면,
동생 4명의 대답의 실제 의미를 나는 다 다르게 해석한다. 
‘못 봤어’, ‘(엄마가 차는 거 봤지만) 말해 줄 수 없어’, ‘매번 언니 물건이 어디 있는지 나한테 물어 보지 마’, ‘지금 내 문제로 골치 아파서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도 않아’ 등, 
실제로 못 봤던가, 거짓말 하는 것이던가, 귀찮다는 뜻이거나, (곤경에 처해서)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뜻 등으로 다르게 해석한다. 

어떤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칼 로저스가 제안한 방법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펌 - 위키 백과) 로저스는 인간은 누구나 현실을 각기 달리 지각하고, 주관적인 경험이 행동을 지배하며, 외부 현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내부적인 경험에 의한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개인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내적 참조 체계(internal frame of reference)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내적 참조 체계란 개인이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눈(眼)으로, 
개인이 어떤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지 어떤 느낌의 틀을 이용하여 생각과 감정을 갖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그 사람이 어떠한 것을 바라보는 대로 그것을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는 심리치료사 혹은 상담사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어떤 내적 참조를 하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손혜원 의원이나 조국 후보가 올케와 제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은, 따라서 너무 당연하다.
상대의 내적 참조 체계를 모르므로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만 환경과 상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게 싫어하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장 중요한 계기가 세월호 사건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매우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국 후보가 저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사퇴를 하지 않는 이유는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우직하고 순진하게 “검찰 개혁”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응원하고 있는 평론가인 김수민씨의 “나중에 해도 된다, 더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다.”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정치공학적인 의견이 아닌가. 그리고 조국 후보가 법무부 수장이 되고자 하는 큰 의미에 대해 너무 도외시하고 있지 않은가.
조국 후보 자신에게는 “나중”은 의미가 없다.
조국 후보 자신은 아마도 개혁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문재인씨가 대통령일 때, 합리적인 윤석열씨가 보스일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닌 나중이라면 조국 후보 자신은 법무부 장관 자리 따위 연연해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적 야당인 자한당과 언론이 그렇게 들쑤셨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후보 자신과 “직접” 관련된 위법의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제대로 드러난 것이 없는 상황이다.
아니면 자한당이 게으르고 언론이 일을 안했거나.

조국 후보의 문제는 사실, 
1.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고 지원하는 아내, 
2. 사업하면서 실패하여 직계가족을 수습하지 못하고 부모가 운영하던 웅동학원까지 동원해 자금 문제를 일으키는 동생, 
3. 조국 후보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던 조카(사모펀드 등)
들이 사고 친 문제들이다.

왜 민정수석이면서 이런 것들을 바로잡지 못했을까-라는 한탄은, 나처럼 조국 수석의 인품을 긍정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발로이다.
이 문제는 “능력”에 대한 지탄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능력과 관련이 적은 것 또한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 수는 없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의 내적 참조를 이해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편안하게 자신의 일만 하고 살면 자기의 내적 참조만을 적용하므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특히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 경우 주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과 “관리” 할 것이 많다.
나는 또 감히 말하건대, 예수와 부처가 “거지”가 아니고 높은 지위의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이 이룬 정신적 깨달음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와 부처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과 공수래공수거를 가르쳤다.
부자와 가진 자가 “무조건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뭔가를 “갖고” 있으면 그 갖고 있는 것을 선하고 올바르게 관리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덜 가지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더 쉬우므로 빈자 예찬을 했던 것이리라.
아무리 관리할 의지와 의도가 있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다수의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 문제를 부모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이번 조국 후보에 관한 현상을 보면서 언론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무제한 기자 간담회에서 언론의 수준을 있는 그대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쏟아낸 기사들의 1% 만이라도 제대로 취재를 했어도 저런 수준까지는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조국 후보는 싸가지 없는 대응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장장 11시간을 시종일관 진정성을 지닌 채였으며 품위를 지켰다. 
언론은 오늘 아침 해명된 의혹이 없다고 난리를 쳤다.
본인이 모르고 있는 부분을 어떻게 해명을 하겠는가.
돈과 지위에 눈이 뒤집힌 인사들이 대부분인 자한당 구성원들이야 돈에 대해 
‘모른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 그 일당들의 내적 참조를 이해하면!
나는 궁금하다; 해명하지 않은 혹은 못한 의혹들이 검찰 수사로 혹시, 
조국 후보가 모르겠다고 한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면 조국 후보의 저 진정성과 품위는 어떻게 표현될지 혹은 돌변할지....
어제 간담회 모두 발언에서 조국 후보는 진심으로 ‘풍족하게 살아서 미안하다’라는 의미의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슬펐다.

잘나신 지도층(?)이 자기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대통령이 고졸 출신인 것이 끔찍하게 싫었던 만큼, 그 이유와는 대척점에 있는
자기네들보다 잘난, 사법 고시에도 응시하지 않은 구름 위 선비같은 조국 후보 또한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밴댕이들....

 

 

 

  1. Commented by ㄹㅈ at 2019.09.30 15:33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현재 평론가 김수민씨에 대한 논란이 궁금하던차에 관련검색글로 읽게되었는데, 글쓴이분의 글에 크게 공감하여 흔적을 남기고싶다는 충동이 들었네요. 오늘까지 토요일 촛불의 거대한 힘에 취해 흥분돼있는 상태이나, 언론의 자세엔 실망을 감출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또 어떻게 나아갈 지... 요즘은 시간이 금방 가버려요. 그럼 또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2. Commented by jenny-come-lately at 2019.10.06 12:34 신고

    조국 장관에 대한 근거는 없는 동시에 개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저의 '생각'만을 나열하였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검찰","언론" 및 "야당"의 행태입니다. 아마 김수민 평론가님은 검찰과 언론의 문제거리는 현재 고려하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그만큼 조국 장관에 대한 실망이 크고 동시에 내년 총선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 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대통령과 조국민정수석은 두 분이 함께 청와대에 계시면서 검찰개혁의 의지가 강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민정수석실 본연의 책임과 능력이 뒤로 밀리게 된 것 아닌가하고 언론보도만 접한 일개 국민으로서 추측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물평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9. 1. 11:29 posted by jenny-come-lately

 

 

알림 : 부정평가만 있습니다. ;;;

 

 

김어준  선동가  

진행자인데 게스트보다 말을 더 많이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전문가나 오피니언 리더를 "동석"시킨다.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다. 

김어준 총수의 선동 전략은, 그와 전문가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장면만으로도 김어준씨 자신이 하는 말이 마치 전문가의 지지를 받은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키게끔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매우 잘 이용한다. 

따라서 김어준씨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말이 더 중요하지 게스트들의 전문적 의견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김어준씨가 진행자임에도 게스트보다 말을 더 많이 하는 이유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썼던 수법을 지치지도 않고 유시민씨한테 강요한다. 그 사람의 상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일단은 김어준씨가 수구우파 진영에 있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민  어정쩡한 소수파 

서민 교수는 '다독과 분별력은 별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인물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분별력은 '창의'적인 것을 말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그는 소수를 지지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왔다. 

서민 교수의 태도가 비교적 진보적일(굳이 구분하자면) 수 있는 이유는 다독 덕분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특('영민'이 아닌)한 사람이라 자신이 읽은 것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의'적인 분별력이 충분하지 않아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선 혼란을 겪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사실은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보수란 폄훼가 아니라, 말 그대로 기존 질서를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전 포스트의 승자독식의 폐해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는 금전적 혜택을 싹쓸이 할 수 있는 “서평 중복게재” 행위를 옹호한 적이 있다. 

당시 서민씨는 글을 잘 써서-사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다지 잘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혜택을 받는 서평자였으며, 

다독(1년에 100권 이상)을 하므로 서평 또한 많이 써서 그만큼 혜택도 많이 받았다. 

1년에 100권이면 거의 3일에 책 1권을 읽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분량의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신>(편향적일 수 있지만 아주 재미있음) 수준 이상의 책을 읽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그의 도서리뷰목록을 보면 대충 내 예상이 들어맞으며 이보다 수준이 낮은 책들도 여럿 있다. 

자신이 위치한 기득권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선 인본주의적인 양심가이던가 아니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했지만 

그는 조금 바빴다-시간이 없었다. 

그는 좋은 것을 잘 배우는 사람이며 착하긴 하지만, 

그의 승자독식을 옹호하는 입장과 경향신문의 칼럼에 나타난 보수적 태도가 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향신문의 칼럼 [서민의 어쩌면]에서 서민씨는 ‘인간인데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는 쪽과,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하니 참아야 한다’의 두 의견이 옳고 그른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커다란 부수적 피해를 가져올 수 있을 가능성을 들어 일본정부에 대한 우리정부의 원론적 대응을 우려하였다. 

칼럼의 결론을 보면 서민씨는 기택의 선택에 대하여 ‘참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원론적 입장을 우려하는 근거가 부적절하다. 고려든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강한 놈한테는 숙여야 한다니. 

기생충에 대한 해석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박사장은 자신이 선을 넘었다.(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박사장이 선을 넘는 순간 기택도 선을 넘은 것이다. 박사장도 기택도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납득할 만한 선택과 반응을 하였지만, 

어떤 환경에서든 취약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존재는 소수minority이다. 

일제 당시 조선은 취약한 식민지였다. 그래서 강제 징용을 당했고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은 세계를 향하여 전쟁 범죄를 사과하였으나 한국에 저지른 패륜에 대하여는 사과를 뒤집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독도를 차지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고 있다. 

한국은 저항도 해야하지만, 이웃 나라에 사는 그 나라의 일반인을 위해 이웃 나라의 정부가 악한이 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정부의 원론적 대응은 보복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선도하는 도움이다.

간단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반박하여 ‘빵이 장미보다 중요하다’는 꼰대적 가치관을 비판할 수 있겠다. 

아베는 매체에서 거의 공식적으로 수출규제가 강제징용판결의 보복이었다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언급하였다. 

이쯤 되면 정부의 이번 원론적 대응은 ‘빵’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또는 민족의 ‘장미’라는 가치를 위한 선택이었다. 

쓰다보니 열 받아서 다니엘 블레이크의 대사와 편지를 복붙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사람이지 개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를 “존중”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슈퍼맨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8. 1. 19:35 posted by jenny-come-lately

 

 

최근에서야 스타워즈 시리즈들을 몇 편 대충 보았다. 영화 속 공통 주제와 소재들 중 하나인 ‘영웅주의’가, 여러 편을 연달아 보다 보니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영웅주의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감이 들었다는 점이 신경쓰여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가지를 정리해야만 했다.

여러 편의 이 시리즈는 아마도 신화적 텍스트, 특히 영웅 서사물로 그 줄거리를 정리하는 게 가장 보편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스타워즈 시리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히어로물에서 이야기의 흐름은, 출생의 비밀(주인공 자신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을 간직한 주인공이 약간의 타고난 재능을 보이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가운데 주변에 거대한 위험이 닥치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주인공이 자신을 희생하여 위험에 맞서며 운이 좋게 해결하고 살아남는다. 여기에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생의 비밀, 타고난 재능, 평범한 일상, 거대한 위험, 각성, 희생, 운이 좋은 해결.

내가 가장 수용하기 어려운 키워드는 ‘재능’과 ‘운이 좋은 해결’이다. 이는 마치 재능이 거대한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키워드들에 대한 의미를 계속 살펴보자면, ‘희생’은 그 대가인데 결국은 희생할 ‘의도’를 보이면 실제로 희생되지 않으며 덤으로 운 좋은 결말이 주어지는 것처럼 해석된다. 재능은 일석이조! ;;;;
또한 타고난 재능은 아무한테나 있는 게 아니라 ‘선택된 자’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출생의 비밀’. 이는 타고난 지위를 보장하는 기초인데 자칫 소수 엘리트를 영웅으로 숭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거대한 위험이라는 것은 영웅을 각성하게 하여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즉, 영웅이 극복해야하는 것이며 동시에 영웅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의 각성을 위해 수많은 주변 사람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거대한 위험은 영웅을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하는가라는 비판적인 질문이 생긴다.

이렇게 나열한 생각들은 영웅에 대한 부정적 견해이고 그 부정성이 마치 타당한 해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상호의존적 자아를 가진 집단주의적 문화의 사람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에 독립적 자아를 가진 개인주의적 문화의 특성을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Heine, Lehman, Markus & Kitayama (1999); Markus & Kitayama (1991)

- 많은 서구 문화권에서는 사람은 고유한 존재라는 신념이 있으며, 
- 타인들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 이 문화의 규범이다(Johnson, 1985; Marsella et al., 1985; J. G. Miller, 1988; Shweder & Bourne, 1984).
- 다른 사람들의 사고, 감정 및 행동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 레퍼토리를 참고하여 자신의 행동을 구성하고 뜻 깊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행동은 개인의 속성이거나 속성의 결과라고 본다. 
- 북미 문화권에서는 집단 기준을 단순하게 따르지 않고 신념을 갖고 용기를 보이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사람들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 이들은 개별화, 평균 이상, 특별한 자질, 출가하여 자신의 길을 찾고 꿈을 따르는 것, 자신의 내부 특성의 긍정성 등을 표현한다. 
- 이들의 자기 평가는 부정확하고 왜곡될 정도로 지나치게 긍정 ‘편향’을 보인다. 이들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용어로 자신을 표현하여 현실과 (문화적)이상 간의 불일치를 줄여 자기를 만족시킨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들의 편향이 더 강하다. 또한, 북미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험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여 ‘비현실적 낙관론 편향’이 나타난다. 
- 자기에 대한 표현과 자기 행동을 규제할 경우 자신의 내적 기준에 따른다.
- 이들은 무능함, 부정성, 의존성을 심리적으로 불편해한다.
- 동기 : 자신의 내면적 요구, 권리 및 역량의 표현과 부당한 사회적 압박을 견디기 위한 동기를 지닌다.
- 타인 중심적 정서(동정, 공감, 미안함?)보다는 자아 중심적 정서(슬픔, 분노,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 혐오감)의 영향을 더 오래 받는다. 


이쯤 되면 이러한 문화 특성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책임을 지는 것,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일 수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 
자기의 표현이 중요한 만큼 반면 덜 겸손하여 긍정적인 대인관계를 해칠 수 있는데 대신, 낯선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친절, 
사회 질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양보하여 규정한 법과 자신의 내면이 의지하는 도덕적 원칙의 준수 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서면에 있어 수치심의 경우, 이들은 자신이 자기 내면의 가치를 따르지 못했다는 것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반면, 상호의존적 자아의 동양인의 경우 대상 인물(들)이 있는, 즉 남보기 창피한 상태와 관련된 수치심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Markus와 Kitayama (1991)가 표현한 예; 법이나 도덕적 원칙을 위반하는 것 vs. 타인을 심리적으로 상처 입히는 것. (중에서 북미인과 일본인은 어느 상태에서 부정적 정서를 경험하는가. 개인적으로, 동양 문화에서 청탁 관련 부정부패와 비리가 더 발생할 수 있는 이유일 수 있으며, 인사 고과나 거래처 선정에서 공정하지 않은 사례들에 대한 배경일 수 있다고 본다.)


종합하면, 서구인들의 영웅주의 서사의 특성은 주체성과 책임에 관련된 것이다. 

이들은 독립적 자아를 가진 개인주의 문화의 사람들이라서 주변인들의 능력이 파리떼로 보이는 영화의 장면들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 

나한테는 영웅 한 사람만 빼고 주변 대다수의 사람들이 파리떼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 문화의 관객들은 오로지 주인공에 집중하며 각자가 자신을 모두 자연스레 영웅에 대입하여 대리경험을 하고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매우 긍정적이고 낙관적 편향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거의 당연하게 여기며 기꺼이 희생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공정성(공평함)이 덕목일 수도 있는 이 서구인들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며 영웅의 능력을 (숭배한다기 보다는 다행히) 찬양한다. 

이들의 긍정성은 매우 부럽지만 비현실성에 대해서는 ;;;
어쨌든 열심히 생각해서 결과적으로 불편감을 조금, 조금은 덜었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독립적 자아 문화의 '단점'과 상호의존적 자아 문화의 '단점' 위주로만 혼합된 사회로 느껴진다.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경쟁은 권장되지만 희생은 실종되었다. 

찬양받는 것엔 집중하지만 책임과 배려(친절)는 도외시한다.

 

 

 

나는 유비쿼터스가 싫어요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9. 6. 3. 15:39 posted by jenny-come-lately

<기생충 관람> 조금 전 아리랑 시네센터에 다녀왔다.

와이파이와 반지하방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나의 정신은 현대가 아닌 다른 지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무선음성통신이 아니라 ‘무선 인터넷 통신’은 21세기에 ‘끼니’와 같은 개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여러 주목할 만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인상 깊고, 중요한 장면은,
비가 온 다음 날, 폭우와 하천 범람을 피해 피난하느라 피곤에 절어 있는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어린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핸드폰을 통해 불려가는 장면이다.
나에게 이 장면은 사람이 돌에 찍히거나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1. 폭우로 인해 반지하 동네는 사람들이 임시 기거하는 체육관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있고,
2. 장난감 텐트를 쳤어도 폭우로부터 안전한 박사장 저택 울타리 안쪽은 푸르고 싱싱한 초목이 단정했다.
3. 핸드폰 같은 문명의 이기만 없었더라도 기택네 가족은 한 숨 돌리고 주변을 추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기택의 살인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냄새’라는 단어를 그 힘들고 피곤할 때 듣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4. 박사장네 가족 또한 기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을 보고, 파티장을 꾸미거나 요리를 하고, 아들하고 놀아주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가정부, 운전사, 과외선생, 요리사들....

‘냄새’의 상징은 오묘하다. 친구는 냄새를, 없는 자들에 대하여 가진 자들이 가진 ‘무의식적 멸시’로 해석하였고,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냄새가 ‘인.간.적.인 사생활 침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친구는 영화가 냄새를 통해 박사장네 가족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어쩔 수 없는 경계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떠올랐을 때 써두자.....)

 

 

TEDx 강연 - 사회심리학자 P. Piff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12. 11. 20:52 posted by jenny-come-lately


연구 주제를 놓고 구체화하지 못하고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 하는 수 없이 반복검증을 하였다.

원 문헌의 저자 Piff가 오랜 시간동안 연구한 것을 강연한 TEDx 영상이다.

미국의 불평등 사회와 유사한 한국 사회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다.


사회적 위계, 계급과 친사회적 행동 등을 연구하고 있는 Piff의 테드 강연

(수고해주시는 자원가님들 덕분에 한글 자막으로 볼 수 있으니 언어 설정에서 수정하여 감상하세요)


 



건강하지 못한 이런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Piff가 제안하는 '기부 행위'등은 rich people이 충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세금도 사회제도가 불합리하게 시행되고 있는 지역이나 국가에서는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있지만 말이다.




스마트 법원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10. 28. 16:50 posted by jenny-come-lately

 

  안희정과 김지은 사이의 성폭력 1심 재판 결과 무죄가 선고되었다. 매체에서 활약하는 변호사들도 선고 전에 무죄일 수뿐이 없다고 예측하였다. 아마도 판사든 변호사든 유죄 선고의 논리를 구성하기 어려운 상황의 사건이어서 법률로 결정하기 쉽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형사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과 재판증거 주의에 따라 법률만으로 한정하면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일부의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판결 요약문 중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여성이 상대방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자유의사의 제압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음에도 자신의 결정을 사후적으로 번복하면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위력에 의한 간음죄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것으로서 범행 당시의 제반 상황에 비추어 위력 행사에 의해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법익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하여야 처벌할 수 있는 범죄입니다.

  김지은은 자유의사의 제압이 위력에 의한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재판부는 위력의 존재뿐만 아니라 위력이 행사되었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 짓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위력이란 국어사전에 따라 아마도 위엄 있는 강하고 큰 힘을 뜻할 것이다. 누군가가 힘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면 인식그 자체로도 개인은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에 많건 적건 영향을 받는다. 김지은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사의 제압이 현저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게 압도되어 법익이 침해된 것이다.

  면접시험장에서 피면접자는 이미 감정과 행동에 제약을 받고 면접자의 기대를 유추하여 평소 자신의 개성, 선호, 성격, 하물며 가치관조차 뒤로하고 그들을 만족시키고자 동기화된다. 이런 장면은 왕 앞에서 머리를 똑바로 들지 못하는 신하들의 경우처럼 합의되거나 교육받은 것도 아닌 상황이다. 면접자들은 비겁하거나 자존감이 낮거나 예의를 차리느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내보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부를 좋아해 부하의 업무평가에 까지 반영하는 것으로 소문난 상사 휘하에서 일을 할 때 상사의 선호도에 호응하여 아부를 많이 하는 직원의 경우를 보자. 아부를 하느라 자신만의 업무성과를 상사의 제안(부탁)에 따라 나누는 것은 평소 유능하였기 때문에 자유재량권을 스스로거부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상사는 자신에게 아부하라고 위력을 행사했을까? 업무평가에 반영한다는 소문을 증명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아부를 그다지 하지 않는 것 같은 부하들에게도(일관성 있게 낮은 업무평가를 하더라도) 젠틀하고 유쾌하게 대하는 상사가 어떤 부하 한 명에게 업무성과를 나누자고 한다면 그 부하는 자신의 업무성과를 상사가 높이 평가하여 나누자고 한 것일 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할까? 업무성과를 나누자고 하였지 아부를 하라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사는 잘 못한 것이 없는 걸까?

 

피고인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지위나 권세 등 무형적 위력을 행사하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행위나 추행을 당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것인지 여부는, 결국 피해자의 진술에 더하여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고인과 피해자의 평소 및 범행 전후의 언행과 태도,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와 범행 전후의 사정,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호소하고 대외적 공개에 이르게 된 경위 등 제반 간접사실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부하직원이 아부를 되도록 안하려고 하고 상사의 눈치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았다면 업무성과를 공유하여 점수를 반반씩 나누는 것은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일까? 이 부하직원이 야심만만한 종류의 사람이라 일단 이 상사와 일하는 동안은 개별 단위의 업무성과 점수를 양보하더라도, 상사의 눈 밖에 나서 업무성과를 발휘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을 경우 이 상사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봐야할까?

  안희정은 관계를 갖자고 하였다. 상사가 사내 규정과 달리 만일 업무성과를 자신과 나눠야 한다고 하였을 경우, 부하가 야심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양보이므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 부하직원이 자신의 승진과정에서 상사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사가 회사의 규정과 다른 요구를 하였다면 상사의 부탁은 잘못이다. 상사가 저지른 행위의 가치를 부하의 의도나 반응이 결정짓는다는 것은 절대로 논리적이지 않다. 상사의 행위와 부하의 반응은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국민적 합의에 의해 구성된 입법부의 입법행위를 통해 성폭력 관련 처벌규정에 관한 체계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이상 사법적 판단에 있어서는 현행법상 구성요건에 대한 엄격한 해석과 각종 증거법칙에 따른 사실인정,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결론을 내려야 하고, 그것이 법원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판사의 선서 :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사건의 판사는 헌법과 법률이 미비하다는 것을 무죄 선고의 이유 중 하나로 지적하였다. 헌법과 법률에의지하자면 양심과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은 애당초 필요도 없다. 판사가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양심적인 해석 결정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차라리 컴퓨터가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정확성이나 속도면에서도. 사법농단 때문에 일부에서 비난받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스마트 법원의 예산을 제대로 검토, 집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도 함께 받고 있다. 그 부분은 감사와 수사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법농단과 성폭행 판결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차라리 스마트 법원을 추진하여 절차와 판결을 컴퓨터에게 맡기는 것이 이런 속터지는 사태와 판결을 방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양심과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은 없을 테지만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하게 판결을 하여 적어도 피고인이나 고소인이 억울해하는 판결은 훨씬 감소할 것 같다. 컴퓨터를 넘어 양심, 도덕, 인본주의, 사리분별, 희생정신을 갖춘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판사나 변호사는 필요 없을 것이다.

  판사에게 주어지는 존경과 명예는, 판사가 비록 인간임에도 양심을 유지하며 자신의 이익과 물욕을 뒤로하고 공평하게 신과 같은 혜안을 가지고 사랑에 기초한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판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합의하여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한 것이 법률이다. 법률은 도구가 되어야하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것이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뀌는 인간의 질서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또한 법률과 판결이 논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떠나 설득되어 합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정성과 정의를 최대한 확립해야하는 이유이다. 이런 논리는 컴퓨터가 더 잘 구현할 것 같다.

 

  판사는 위력의 적극성 부재, 법률의 미비, 증거 불충분, 피해자다움 등을 근거로 하여 무죄로 판결하였다. 판사 자신을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 무능한 법전의 해석자로 전락시켰다. 왜 무능하냐면 위력의 본질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고, 사회상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였으며, 비논리성까지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재판의 당사자들, 그들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판결은 따뜻함과 사랑을 내재한 윤리와 논리에서 나오며 그래야 사람들이 수긍하고 따르게 된다

  안희정 성폭력 판결을 대하니 이쯤 되면 판사들이 양형기준에 얽매이는 이유가 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결에 대하여 책임을 면하고 욕먹지 않기 위한 전략 때문일지 모른다고 의심된다.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약해서 그 비굴함이 권력, 경제 관련 판결은 양형기준에 훠어어얼씬 미달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서 타당하게 유추된다.

 

  김지은은 유능하고 야망 있는 여성일 확률이 많다. 아마 안희정이 가진 정치적 자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정치인생을 구축해나가고자 했을 것이다. 안희정의 사상과 행보에 많이 공감하고 비서 역할을 하면서 친밀감도 높아지게 되었을 것이다. 안희정이 요구한 몇 번의 성관련 요구는 당황스럽지만 지지하는 마음과 친밀감을 붕괴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거절하면 안희정은 좋은 사람이니까 자제를 해줄 것이다. 안희정의 정치적 노선을 포기하고 다른 시작을 하느니 안희정과 좋게 해결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나 안희정은 폭력은 행사하지 않지만 김지은은 점점 심리적 강압을 경험하게 되었고 따라서 신체적 접촉이나 성관계는 외견상 변한 것 없이 안희정이 조심스럽게 의사타진을 하더라도 이미 상황은 폭력으로 해석되거나 간주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횟수와 기간이 늘어나고 종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안희정은 아마 자신의 요구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런데 여성 인권에 대한 진보적인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고 지지한다. 저런 주장을 하고 있는데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 맞을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김지은의 처신이 부적절한 것은 맞지만, 부적절하다고 해서 김지은의 처신이 안희정의 죄과를 무마시키거나 안희정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그 두 가지는 상관이 없는 각각의 사안이다. 그리고 김지은의 처신은 그녀의 학력 또는 유능함과 비례하는 사안이 아니다. 사자가 토끼 앞에 갑자기 매우 가깝게 나타났을 때 얼어붙은 토끼에게, 토끼 너는 달리는 것을 매우 잘하는 동물인데 안 달렸으니 잡아먹히고 싶었던 것이 맞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모임의 첫 회] , 모두들 간략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는 유치원 원장이고 해외여행이 취미에요.

: 저는 백수에요, 화초가꾸는 것이 취미입니다.

: 저는 청소를 하고 있고 영화보는 것이 취미입니다.

: 저는 판사인데 독서가 취미에요.

,,: 에그머니 아주 몹쓸 일을 하고 계신 양반이네....

 

  안희정이 대선 후보 경선 때, 자유한국당을 대상으로 연정 운운하였을 때 꼴 보기 싫었던 마음이 컸다. 지금 비유하면 마치 자한당에게 성관계 맺자고 유혹하는 것을 보는 것과 유사한 감정이었다.

 

 

험담으로....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6. 6. 19:57 posted by jenny-come-lately


양승태 전대법원장 재판거래 의혹


민주주의 국가로써 3권 분립을 위한 기관이 있고, 

이 중 행정부 수반과 입법부 의원들을 직선제로 선출하는데, 사법부의 법관이 임명직인 것이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대통령, 국회의장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3대 권력인 대법원장이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한 인간이었던 바람에 

저런 꼴사납고 부끄러운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법관(판사) 보기를 돌처럼 할 것 같은 심정이다.


일개 민초가 판단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돈벌이와 관련된 변호사들 말고 

국가기관에 종사하는 법조인들의 일이 행정이나 입법 분야의 일보다 수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본전 생각이 나서 세금이 아깝다.

수월할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법은 논리적이고 대한민국의 법은 성문법이기 때문이다. 

판사들처럼 명석한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이들의 어려움은 법을 해석할 때나 닥치게 된다.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도 법은 공정하여야 하고 그 본질은 약자의 보호질서의 유지이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판단하면 되는데,

왠지 반평생 숨만 쉬고 산 나 같은 아줌마가 해도 저분들‘보다’ 잘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질서의 유지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가치여서 다른 당파보다 보수당에서 더 소중히 해야하는 덕목이다.


약자의 보호는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무였는데, 그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는 방법은 

따르는 자들을 외부의 위협과 기근에서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와 전설의 위대한 왕과 장군들은 그들의 백성이나 부하를 뒤로 하고 전장에서 맨 앞에 나서서 

그들을 따르는 자들보다 훨씬 큰 용기를 증명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였으며 

부자들은 지역 사람들한테 나눔(노블리스 오블리제)을 통해 명예와 존경을 획득하고 유지하였다.


그러니 우리는 학생들 수백 명을 바다 속에 가라앉힌 것에 큰 책임이 있는 박근혜나, 

자신의 나라의 재정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은 이명박이나, 

근로자들을 백혈병에 걸려 죽게 하는 삼성이나, 

가족들이 시시껄렁한 범죄행위나 저지르고 있는 한진그룹 일가 등등을 비난할 수 있다.

비난하는 우리들 중 사기꾼과 도둑이 섞여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정치인들에게 표를 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방 선거가 일주일 남았다.




유쾌하게 영화를 보시는 분의 통쾌한 감상평을 추천하면서 마침.


 




편리한 시설의 배반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3. 31. 20:41 posted by jenny-come-lately




편리한 시설의 배반 -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에 대한 반감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도시의 편리한 시설들에 대하여 감탄한다.

- 한국은 아파트가 많으며 

- 유럽은 국가의 중심도시나 잘 알려진 도시여도 개발이 덜 되어 있고 비교적 옛 모습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추정컨대, 아마도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세금이 시민들에게 직접 혜택으로 돌아가는 행정을 하고

한국의 경우, 시민들은 배고파 죽겠는데 건물과 사회기반시설 건설 대금으로 

민간 기업에게 세금을 내어주고 민간 기업이나 중간 업자들이 그 세금을 꿀꺽한다.

그렇다고 이 작자들이 투자나 고용을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사내 유보금만 잔뜩 쌓아놓고 있다.


어떤 학자나 단체에서 이것을 자료로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작년 1년을 날려 먹다시피 해서 올해 1년은 졸업준비 때문에 시간이 없다.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해온 결과 한국의 큰 도시들은 외국인들에게는 편리한 도시가 되었고

한국인들은 N포 세대가 되어 가고 있다.


내 생각에 더 이상 한국의 행정부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려고 하지 말 것이며

‘체감되는’ 행정을 펼치고

국회의원들이 지역 개발 자금을 유치하려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비례대표제나 대선거구제를 채택해야 한다.





[약속]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10대 시절 읽었던 카프카의 [성]에서 해결될 수 없는 막막함이 ‘체계와 착실함’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는 텍스트로 다가와서 좌절스러웠다면,

뒤렌마트의 [약속]에서는 그 해결될 수 없는 막막함이 ‘분별과 명민함’을 배반하는 텍스트로 읽혀서 좌절스러웠다.

그리나 곧 각각의 그 좌절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다. 

[성]은 나에게 부족했던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대함’을 조금이나 늘리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고.

[약속]은 평소에 꽤 비중을 두었으나 친구들과 공유하지 못했던 ‘경외와 신성’(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의 중요성에 대한 확인을 받은 것 같아 위로 받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하찮은 감정인 질투와 경쟁심이 얼마나 커다란 폐해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후반부의 ‘시시한(banal의 번역으로 더 적절하다고 봄) 해결’ 부분에서는 그 노파와 같은 사람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 새삼 너무 현실적으로 떠올라 지긋지긋함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하였다.


추리 소설은 어렸을 때 읽은 몇 권이 고작이고 이후 흥미를 갖지 못한 이유는,

작가의 전개에 휘둘린다는 느낌이 개인적으로는 불쾌했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연을 즐기지 않고 오로지 퍼즐 맞추는 것에만 신경 쓰는 까칠한 독자인 나는

주도권을 쥔 작가에게 늘 불만이었기 때문에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속]은 꽤 공정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며 주인공의 집요하고 성실한 탐색에 공감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 분별, 명민함 등 인간의 능력만으로 해결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뚜렷하게 보여주었으며, 

이 주제가 추리 소설의 방식으로 인해 더욱 효과적이고 탁월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매료되었다.

우연, 부조리, 비논리성, 치졸함과 저열함의 지배성...(이로 인해 무너지는 천재의 합리적 문제 해결 방법)

나는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뒤렌마트의 생각에 적극 동의한다. 


[약속]은 오래전에 절판되었고 발행 부수도 많지 않아서 

대부분의 도서관들에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독도서관에서 급하게 한 번 읽고 

10여년이 훨씬 지난 최근 우연히 검색했다가 재간된 것을 발견하고 얼른 구매해서 읽었다.

책에는 [사고]라는 소설 한 편이 더 실려 있는데, 

경쟁적 상업주의(혹은 자본주의) 사회가 범죄 자체를 잉태하고 있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아래 몇 자 옮김)**********************************************************


주인공 마태의 대사 : ... 나는 이 세상과 맞서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노련한 대가(大家)처럼 세상을 극복하려 했지, 세상과 맞붙어 괴로워하는 걸 원치 않았어요. 세상에 맞서 우월한 위치에 머물고 싶었지요. 숙련공처럼, 당황하는 법 없이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겁니다...  


H박사(전임 경찰국장) : 

... 우리는 겸허하게 우리 사고에 이를 합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조리에 부딪혀도 깨지지 않고, 

이 지구를 웬만큼 살아봄직한 장소로 만들 채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

... 우리 오성(悟性)은 실로 빈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 가까스로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성의 빛이 가 닿는 어두컴컴한 지대엔 온갖 패러독스가 자리 잡고 있고요.

이 패러독스라는 도깨비가 마치 인간 정신 바깥에 자리 잡고 있는 듯이 그것 '자체'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아니면, 이건 한층 고약한 경우인데, 이 도깨비를 유혹받기도 하고 피할 수도 있는 무슨 오류처럼 치부하는 착각에 빠지지 맙시다.

일말의 하자도 없는 이성적 기구를 관철하겠다는 시도 아래, 완고한 도덕의 틀 안에서 세계를 처형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그 하자 없는 완벽함이야말로 그 같은 시도가 지닌 치명적 허구이며 어이 없는 맹목의 표식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






인간성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1. 25. 01:08 posted by jenny-come-lately




학술적인 책이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드문 경험


[혐오와 수치심]은 법에 의한 처벌과 제도에서 정상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의 과오에 대한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빈틈없는 오류를 지적하는 명석하고 힘 있으며 품위 있는 책이다.

최상위에 놓아야할 가치인 인간성에 대하여 철학, 심리학, 판례를 통해 정교하게 분석하였기 때문에 

머리와 가슴을 지닌 존재라면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가치를 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흥미롭게 주목하게 된 개념을 추가적으로 꼽자면 ‘역량’과 ‘온정주의’, ‘도덕적 공황’이다. 


하나하나 곱씹으며 생각해봐야할 보석 같은 글로 채워져 있는 책이지만

마지막 챕터에서 요약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 몇 개의 문단을 다소 건조하더라도 옮겨 놓는 것이 

이 존경스러운 학자의 업적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는 노가다라고....


제대로 된 인문학 서적은 짧은 메모를 포함 1시간에 50페이지뿐이 속도가 나지 않으므로 읽는 데 이틀이나 걸렸는데

2 주전에 읽으려고 했던 책-휴머니즘의 선택이 실패했던 것을 아쉬워하던 차에 휴머니티의 이해를 통해 넘치게 보상 받아서 개운하다(책의 영어 제목이 Hiding from 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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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한편으로 지적이고 재간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약하고 취약하여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에 대해 깊은 불안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다루기 곤란한 조건을 수치스러워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숨기려고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수치심과 우리의 동물성과 유한성의 징후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가르친다. 혐오와 원초적 수치심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게다가 혐오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역할을 하며, 원초적 수치심은 적어도 사람들이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게 자극하는 보다 생산적이고 어쩌면 건설적인 수치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은 개인적 삶과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적 삶 모두에서 쉽사리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두 감정은 지배적인 집단이 다른 집단을 예속시키고 낙인찍는 사회적 행위 양식과 연결된다. 혐오의 경우,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행위자 자신의 두려움과 연관된 속성은 힘이 약한 집단을 대상화해서 투사되며, 이들 집단은 지배적인 집단이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 예속된 집단과 그 구성원들의 몸은 혐오스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예속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 수치심의 경우, 무력감과 통제력의 결여가 불러일으키는 보다 일반적인 불안은 완전무결함(또는 유아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완전함에 대한 환상의 회복)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지닌 안정적인 통제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한다고 여기는 하부 집단에 낙인을 안겨 줌으로써 통제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얻게 된다. 하부 집단은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적 불안의 초점이 되어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단순히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다. 지배 집단은 ‘정상’이라는 편안함을 안겨 주는 허구를 통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불안을] 숨길 수 있다.

  낙인을 안겨 주는 행위가 곳곳에 편재되어 있고 뿌리가 깊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존중하고자 하는 사회에서는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잣대로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수치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수치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심과 부정적 형태의 수치심을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긍정적인 수치심도 부정적인 형태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처벌이나 법 제정 과정에서 수치심을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차별과 낙인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방학 자축 방탕한 시청생활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1. 10. 02:28 posted by jenny-come-lately



방학을 자축하는 이유 ; 프라이버시, 구차함 때문에 생략



[마인드 헌터]

범죄 심리학 세미나에서 동료 선생님이 추천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볼 기회가 없었을 듯.

이유 없이 일어나는 범죄의 발생과 증가를 맞닥뜨린 FBI 협상 전문가가 범죄분석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이야기.

이 시리즈의 샤를리즈 테런과 공동 제작자이자 1,2,9,10화의 감독인 데이빗 핀처의 이력을 인터넷에서 읽어보면

이 사람은 공부할 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 도대체 전작들 포함 저런 지적 통찰과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이 시리즈를 소개하면서 [크리미널 마인드]가 자주 언급되는데 언감생심 어따 대고...


1화의 경우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캐릭터와 시대 배경의 소개가 지나치게 친절한 감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매우 필요한 내용들이다.

60년대 출발했던 히피 문화가 여전히 만연해 있는 시기에 외면을 넘어 비난을 받고 있는 FBI의 한 요원이자 강사가

당시의 그 조직 문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니 그 반대로 새로운 것에 대하여 무한 수용하는 태도와 지적 열망으로

자신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개척해나가는 도입부인 1화는 많은 내용을 낭비 없는 연출로 시청자를 홀린다.

시즌 1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범죄자는 역시 에드 캠퍼인데,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소품이 안경이다.

노안이 아닌 경우 대체로 시력 문제는 근시인 경우가 많아 오목 렌즈를 쓰는데 눈이 작아 보이게 한다.

캠퍼는 볼록 렌즈를 씌워서 그의 큰 덩치와 살짝 커 보이는 눈이 그의 정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더 폴] 

맘대로 소개 :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살인물


살인범은 정교한 과정을 통해 여성을 죽이고

유능한 관록의 여성 수사관이 그를 잡는다. 그리고 이 수사관은 주변의 남자들도 의도치 않게 잡는다.


대사들 :

- 자네는 자네가 남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나? 난 아내를 떠났어.

- (축약해서)남성이 여성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여성이 비웃을까봐, 여성이 남성에게 위협을 느끼는 것은 남성이 죽일까봐 (오랫동안 상당한 의문을 가졌음에도 나만 모르고 있던 이 쉬운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가 남성에게서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르노물에 대한 남성들의 집착은 당연히 이런 문제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프로이드적일 것이다.

죽일까봐도 아니고 비웃을까봐 라니 – 현대에서 이런 의식은 그 주체가 약한 것만은 틀림없다.


짐(스텔라의 상사, 스텔라에게 올라타려다 스텔라에게 얻어터지고 나서) : 왜 여성은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자보다 강한거지?

스텔라 : 기본적인 인간형은 여성이니까. 남성성은 선천적 장애같은 거야

짐 : 스텔라...

스텔라 : 당신 지금 스카치 보듯이 날 보고 있어.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스카치. 맘에 안들어.




[1987] 

서사의 개취 : 성장물 좋고 영웅물 싫다


영웅물이 싫으므로 [1987]엔 정치인이 안나오는데 이것만으로도 ....

그리고 배우들은 영웅 역할을 맡을 만한 주연급들이 무더기로 등장하여 자신들이 해야할 만큼만 연기한다.

김효정 평론가의 앙상블에 대한 긍정 평가가 그래서 충분히 설득력 있다.

미디어 오늘의 ‘절반만 보여준 1987’이라는 평가는, 이 사건을 처음으로 다룬 영화에 대하여 너무 성급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몇 번 더 다른 지점들이 영화화 되어야 할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굳이 이 영화를 본 이유는 2가지 이다.

* 완전 좋아하는 걸작 [지구를 지켜라]를 만든 감독의 작품 

* 신경 쓰이는 김태리의 빨간 더플코트 


빨간 더플 코트가 신경쓰이는 이유는 매우 우려스럽게 [인랑]이 제작되고 있어서다. 

사랑하기 부적절한 환경과 성격의 남자 후세가 비극적 사랑을 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빨간 더플 코트 소녀와의 만남과 죽음이다.

제목이 [인랑]인 이유는 후세와 특기대가 늑대의 여러 이미지들을 모티브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니에서 빨간 더플 코트의 소녀는 ‘늑대와 빨간 두건 소녀‘와 비교되는데

동화나 여자 주인공과 달리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늑대를 인도하지 않고 두려움을 이기며 자폭한다.

이 인상 깊은 경험 때문에도(? 아니라는 설도...) 후세는 소녀의 납골당에서 소녀와 꼭 닮은 그 언니(가짜) 케이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야말로 그 언니는 빨간 두건을 쓰고 있었고 결국 늑대에게 할머니 집을 알려주었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후세측에게 간파당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 (죽은)인질이 되고 만다.

대장이 케이에게 정황을 설명하는 동안 특수복을 갈아입는 후세의 모습이 정말 슬프다.

장준환 감독이 김지운 감독과 dvd 감상 모임의 멤버이기 때문에 이 중요한 소품에 대해 알았을 확률이 많은데

혹시 그럼에도 빨간 더플 코트를 김태리에게 입혔다면 빅엿을 먹인거나 다름이 없다.

김태리나 소녀는 둘 다 은밀히 조직에게 중요한 물품(편지글, 폭탄)을 전달하는 메신저다.

(** 그러나 혹시 [인랑]에서의 소녀를 김태리가 그대로 연기한다면 완전 대박이겠다.)

감독은 스투디오의 다른 사람이지만 오시이 마모루가 시작인 애니메이션 [인랑]은

내가 본 사랑 영화 중 괜찮다고 할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고, 비극이 건조하게 연출되어 매우 좋아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실사화 한다니... (김지운 감독의 작품을 거의 보지 못했고, 악마를- 은 싫어하는 작품이다.)

미국에서 실사화한 영화 [공각 기동대]가 개망하고 난지 얼마 안되는 시기라 더욱 걱정스럽다.



신년맞이 독서 실패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8. 1. 7. 00:34 posted by jenny-come-lately



영화 [완득이]에 노골적으로 책이 하나 소개된다. [휴머니즘의 옹호]

얼마나 끌리는 제목인가, 그러나 결국 전체를 다 읽지 않았다.

머리말 출발이 좋았지만 그 다음 챕터에서 망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챕터들에서 다루는 것들은 속단하여 건너뛰었고 끝에 배치된 주제 부분은 공허했다.


머레이 북친의 휴머니즘은 이성에 기반한 윤리 능력을 표방한다.

이성과 윤리를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치부하는 논리들을 비판한다.

북친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문제시할만한 이념에 대해 신랄한데

어떤 이들은 독설하는 것으로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어차피 대중이 문제시할만한 이념이라면 

오피니언 리더가 굳이 전면에 나서서 손가락질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는 몇몇 이론들을 오해석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데에 인용을 한다.

또한, 그의 주장과 그가 비판하는 것을 연결 짓는데, 논리적 연결이 빈약하다.

게다가, 이성과 윤리의 필요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사람외의 동물과 다른 점을 

1990년대 중반이라는 시기에 역설하는 것은 너무 때가 늦다.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의 윤리를 무기로 장착하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쉬워진다.

윤리적이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것도 북친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지는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적어도 [휴머니즘의 옹호]에는 해답이나 해답을 얻기 위한 방법도 없다.


비윤리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처벌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난’ 자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맥락을 ‘사정참작’으로 오용하지 않고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타인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이고,

이것이 가능해야 그가 주장하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고’, ‘ 가공할 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알기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북친이 주창하는 (상보)윤리는 옳을 가능성이 매우 많지만

아쉽게도 그의 논거는 주제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






진보성향의 도덕기반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7. 12. 12. 13:48 posted by jenny-come-lately




하이트(Jonathan Haidt)의 도덕성기반이론은 ‘돌봄/위해, 공정/기만, 충성/배반, 권위/파괴, 신성/타락‘의 다섯 가지에 기초한다.

하이트는 진보성향의 사람들은 돌봄과 공정기반 관점에서, 보수성향의 사람들은 5가지 기반 모두의 관점에서 도덕을 판단하고 현상을 파악한다고 하였다.

Graham과 동료들(2009)은 이 중에서 공정과 돌봄은 개별화 기반이고, 충성, 권위, 신성은 결속 기반이라고 분류하였다. 

결속 기반은 집단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생물이든 모두 어느 정도 집단을 이루어 생존하며 단독으로 존재하여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쩌면 ‘집단’은 원초적인 성질을 내포한다. 

개인이 모여 군중(집단)을 이루면 심리적 기제가 달라진다. 

개인은 군중 속에서 혼자였더라면 그것이 좋든 나쁘든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

애쉬의 동조실험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집단 의견에 따라 자신의 생물학적 기능까지 부정해버린 것이다. 애쉬는,

"충분한 지적 능력과 판단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조차도 기꺼이 흰 것을 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우리의 교육 방식과 우리의 행위를 이끄는 가치관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할 수밖에 없다."(나무위키 펌)

또 나쁜 예로 ‘방관자 효과’가 있다.

이런 가운데에 누군가의 ‘집단과는 다른 개별 행동’은 집단에 영향을 준다.

애쉬의 선분 실험은 이어지는 후속 연구들에서 

가짜 참여자들 중 하나가 집단과 다른 의견을 내자, 실험대상자 대부분은 자기 차례에 정답을 말했다.


이쯤 되면 Graham 등의 개별화는, 집단이 행여라도 불합리하거나 비도덕적일 경우 

사회적 압력을 이기고 집단의 부정(의)이나 공격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개인의 불합리하거 비도덕적인 경우가 개별화되는 경우 

집단이 그 개인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기까지 살펴봤을 때, 인류의 진보는 집단에의 동조나 순응의 방법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나 자율의 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분명히 주장하는 바, 개인의 선택이나 자율의 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양을 확보해야 질 향상 관련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개별화 기반을 중요시하는 이유의 하나로 이런 논리를 제시한다면, 

지금 이 시점에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결속 기반을 포함하여 중요시하는 이유의 논거가 무척 궁금하다.

가치는 상충할 수 있다. 도덕기반이라는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돌봄과 충성이나 권위가 상충하면 이들은 돌봄을 잘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거지가 먹을걸 달라며 왕에게 욕을 해대면

보수성향의 사람들은 이 거지를 감옥에 가둘 것만 같다.


뉴스 하나, 드라마 하나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7. 7. 29. 13:44 posted by jenny-come-lately



<이달 초에 인터넷 뉴스에서 접했던 뉴럴링크 관련>


나는 망net, 장field, 파wave와 관련된 ”고도”의 기술에 대하여 보수적이다.

이런 태도는 TCI검사에서 측정된 기질(높은 자극추구, 낮은 위험회피)과는 정반대에 가까워서 스스로도 매우 낯설다.

(보다 정확한 분석이 필요한데)현재 ‘통제욕구’라고뿐이 표현할 수 없는 내 고유의 어떤 특징은

여러 면에서 내가 긍정적이고 적응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런 개인적인 기질의 특징 때문에 저 기술들이 반갑지 않다.

망, 장, 파가 만나면 간섭에 의해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두 세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만날 때 통제가 될 수 있을까?

요소들끼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은행전산망 스마트폰 등이 각종 해킹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터넷 사이트 회원가입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 현명한 선택이다.

생각만으로 사물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뉴스기사에 예로 나와 있듯이

신체움직임이 불편한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인데

일반인들이 굳이 이 기술을 이식받는 이유가 ‘고양이의 호기심’보다 나은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신기술들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표방되지만

실은 선민 욕구나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을 

과거와 현재를 통해 늘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숨 한 번 쉬는 찰나에 잊어버리고 만다.





<비밀의 숲> - 드디어 이번 주가 막방. 추리의 즐거움을 위한 몇 가지 찍기.


1. 황시목과 이창준은 이렇든 저렇든 같은 편일 듯. 

(황시목이 이창준을 믿지 않는 것처럼, 이창준도 황시목을 믿지 않음)

(동부지검에서 흩어진 정의파와 브레인들이 서부지검에서 만난 상황 – 황시목, 강원철, 이창준, 서동재)


2. 지난 14화 마지막에서 이창준은 장인인 이윤범과 일당들의 대화를 녹음할 것 같음.

(화장실 다녀오기 전에만 몸수색을 당하고 다녀와서는 무사 통과한 상태) 


3. 살인범은 여럿일지도 모르고 우두머리가 이윤범이 아닐 수 있을까?


4. 김정본 : 이창준이나 이윤범이 황시목에게 심었을 것 같음.


5. 영일재도 권민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명절과 모성애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7. 2. 2. 11:17 posted by jenny-come-lately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위대한 본능으로 칭송되어진다.

동물 다큐를 가끔씩 즐겨 보는데 모성애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사람으로 한정 짓는 ‘어머니’의 위대함이 아니라 ‘어미’의 위대함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모성애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은, 과장되고 선정적인 논문이나 저서의 제목일 뿐

모성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모성애를 강요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제목붙이기 전략이다.


모성애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위대하다.

어머니에게 매우 감사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지만 어머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곤 하는데 좋아하지 않는 마음도 어머니에게 감추지는 않는다.

그러는 내게 어머니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이런저런 꾸러미를 싸서 쥐어주신다.

‘이거 없지? 가져가.’, ‘맛있대서 사 놓았다.’, ‘김치 떨어져간다고 해서 담궈 놨다.’ 등

그저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때로 당신들의 욕망을 위한 목적도 덤으로 얹기는 하지만)

성체가 된 새끼를 독립시키는 동물과는 달리 사람은 평생 자식의 안위와 입신을 고대하며 돌보려 한다.

이것은 늘 내게는 진정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무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인간의 삶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적자는 사회를 파괴하지 않는 인간의 종류일 텐데 

배려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아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고 여겨진다.

능동적 파괴자도 소수 있지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소극적 파괴자들이 많다고 느낀다.

적자만 생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비적자도 많이 존재한다.

명절을 보내면서 이런 비적자가 사회에 많이 존재하는 데에 작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 중 하나가 이들을 돌보는 모성본능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솝우화들 중 하나가 있다.

(이솝우화나 성경은 어렸을 때 이상하게 호감이 가지 않았으며 철이 들어서는 이런 것들이 매우 폭력적이라고 여겨져 어린이들이 읽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린 아들이 작은 것을 훔쳐왔을 때 그 어머니가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아들은 점점 크고, 많고, 비싼 것을 훔치게 되었고 결국 어느 날에는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사형을 앞두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집행관(? 왕?)에게 청하였고 이것이 허락되어

어머니는 훔쳐 놓았던 보물이 있는 곳이라도 알려주려나 싶어 자신의 귀를 아들의 입에 가까이 갖다 대었는데 

이 순간 아들은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었다.  어머니가 고통에 놀라 화를 내고 소리치며 그 이유를 묻자 아들은,

어렸을 때 작은 것을 훔친 자신을 어머니가 제대로 계도하였다면 지금 이렇게 사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하며 말했다.


내가 얻은 교훈의 관점은 '나쁜 습관 여든까지'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보다는 '비뚤어진 모성애의 참담한 결말' 쪽이었다.

(이런 관점은, 이야기속의 어머니와 아들에서 초딩인 내가 자신을 같은 지위에 있는 아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킨 결과일 수도 있으나

사실 내게는 개인적으로 권위에 대한 심리적 이슈가 있다는 것을 교육분석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왕 삼천포로 빠진 거 조금 더 샛길로 빠져본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 이 이야기를 어린 시절 읽었을 때 궁금한 점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이뻐서 도둑질을 해도 무조건 칭찬한 것인지,

아들이 훔쳐온 물건들이 좋아서 아들의 도둑질을 격려하며 충동질하는 나쁜 사람이 할 법한 칭찬인지

혼란스러웠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비뚤어진 모성애는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인지, 

나쁜 사람은 모성애도 저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이야기 속에 교훈이나 주제는 한 가지만 있을 것처럼 배우는 교육환경에서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는 애늙은이가 있었다.

(잘난 체 하면 부끄러운 정도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가 더 커져서 흐흐.... 빈약한 자존감에 대한 부정적 방법으로의 심리적 보상...)


우리 동네인 시골 읍내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여기에 산지 만 6년이 넘어가고, 햇수로 8년임에도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가래침, 담배꽁초, 반려견의 똥, 각종 쓰레기들에 몸서리를 치는데 

그 기간 동안 전혀 둔감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빈민가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어서 내가 조금 까다로운 성향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부촌인 서울의 강남 거리는 깨끗한데, 이러한 차이는 인간성의 차이가 아니라 금전력의 차이이다.

쓰레기를 주변에 버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태는 돈에 의해 그 결과가 감춰진 것이다.

어디든 비적자들이 생존하고 있고 모성애의 가호를 받아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제외되며 개체수가 줄 지 않는다.


인류는 변화할 뿐 진화하거나 발전하거나 발달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소의 지론,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배려하고 양보하는 적자들의 절대량은 늘 수 있어도 

전체 인구에 대한 그 비율은 일정할 것이라는 적자비율보존의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지론,

비율이 감소하는 것은 인류의 소멸을, 비율이 유지되는 것은 희망의 지속(희망의 달성이 아닌-이루어진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을 의미할 뿐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능동적으로 제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지론.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비난받을 만한 이 지론을 버리지 않는 나는,

이 지론이야말로 인류에 대하여 '건강하고 솔직하고 어쩌면 합리적인 희망'을 갖고 있는 긍정적인 사람의 견해임을 언젠가는 친구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TAG 모성애

Special Edition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7. 2. 2. 11:11 posted by jenny-come-lately



지금까지 안드로이드폰을 썼었다. 

아이폰에 대하여 그동안 아쉬웠던 것은, 내 기준으로 보기에 예쁜 5시리즈가 성능은 내 기준에 못 미친다는 점.

구체적으로 밧데리 사용시간, 가격, 속도 문제였다.

6 시리즈가 나오면서 아이폰이 성능은 좋아졌으나 디자인 별로고 크기도 취향이 아니었다.

SE가 나오면서 구매를 망설이게 한 것은 오로지 가격뿐이었다.

설마 5 디자인이 다시 나올 줄은 생각을 못했는데 반가울 따름이다.

64용량이 직구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하된 시점에 국내애플에서 구매했다.


디자인과 크기 비판 - 4인치의 5시리즈를 선호했으므로 문제없다. 

4인치를 원하지 않으면 다른 큰 폰을 사면된다. 남자사람에게 왜 남자냐고 비판하는 셈.

6시리즈와 7이 나오는 와중에 이전 크기를 접하니 오타가 많이 난다고들 하는데, 

Siri에게 메모 작성해달라고 해서 불러준 다음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하면 된다.  

카톡 등 자판을 많이 이용하는 유저들의 경우 불편하겠지만 나한테는 전혀 문제없다. 

자판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주로 문자 주고받기를 많이 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다른 앱은 이용할 여유가 별로 없을 테고 또 그렇다면 

se 말고 다른 폰을 써도 된다.


5시리즈 부품 재활용 비판- 디자인이 거의 같은데 성능과 상관이 없다면 견고한 부품이라면 재활용 자체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재활용이라고 해서 중고는 아니니까.


3d 터치 등 일부 성능 비판 - 크기 작고 6이나 7보다 저렴한데 뭔가 더 추가하는 것은 현 시점에선 타당하지 않은 불만이라고 생각한다.

(se든 6이나 7이든 어쨌든 애플의 가격엔 불만이다.)


주머니 등에서 폰을 꺼내지 않고도 이어마이크와 Siri를 이용해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수 있다.

잠금화면 열 때 지문 인식하는 방법을 쓰면, 홈키를 누르지 않아도 되므로 부품 피로도를 높이지 않을 수 있다.

(들어서 깨우기 설정을 하면 se를 움직일 때 액정이 켜지지만 깨우지 않으면 켜졌던 액정이 금방 꺼진다)

갑자기 잘 되던 이어폰이 지지직 거리다가 전혀 안들려서 고장인가, 뽑기 잘못 걸렸나 했는데 

검색한 조언들에 따라 재부팅을 했더니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버그지?....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쉬운” 통화중 녹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se는 게임, 영화감상, sns를 주로 사용하는 유저들한테는 적절하지 않다.

좀 더 개성있는 유저들에게 은근히 선호될 것이다.





이념과 경제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7. 1. 11. 23:23 posted by jenny-come-lately



현대의 정치는 확실히 "이념"이상으로 "경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시민을 위한 X맨인가, 위선의 정치인인가 - 


라이시의 예측으로 차후 미국의 최대 정치적 분열은 좌파와 우파 간 대립이 아니라

소수의 비근로부유층과 다수의 근로빈곤층 사이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 우아하게 이념으로 포장하여 구분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오로지 돈'이라고 하는 것 같아 통쾌한 감이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문제들에 대하여 로버트 라이시가 분석한 원인은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부유층이 경제력을 무기로 정치에 영향을 미쳐서

운동장의 규칙을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바꿔왔기 때문에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정치적 분열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개념인 대항세력을 다시 결성하여

그 규칙을 바꾸거나 새로운 규칙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책에 나와있는 내용들로만 고려해 볼때 이 방법도 별로 신통치는 않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이 로비활동과 선거자금에 휘둘리는것이 책에 의하면 둘 다 돈 문제다.  

돈 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돈"을 가지고 활동할 "시간"이 있다고 한다.

현재 근로자들은 임금이 낮아 생계를 위해 초과근로를 하다보니 시간이 없고 당연히 돈도 없다.

대항세력이 형성 또는 결집될 수 있는 상황이 절대적으로 될 수 없다는 데에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로버트 라이시는 대항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을 열거하기는 했으나

이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에 대하여는 정치인들의 의무를 피해가는 듯한 변명도 한다.

정부기관을 감시할 수 있는 공무원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쓰면서도 정부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던가,

정치인들이 개인의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은 합리적인 자유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든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국 법정이 부패의 정의를 너무 좁게 해석한다고 쓰기도 했다.)

중산층 쇠퇴의 원인을 중산층 자신들에게 지운다든가(적은 급여 합의, 노조 소멸)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회안정에의 진정성이 있는 정치가들이 부자들과 협상해야 할 최소한의 안건은 적어도 달성해 놓고

대중들에게 결집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근로자들이 결집할 수 있는 "시간"의 확보이다.


구체적인 방법에 접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원리원칙에서 너무 멀어져 정돈되지 않은 논리전개는 그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반면 부의 상향 분배가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과

어느 부분에서 제약을 걸어야하는가 전략을 짚은 점은 독자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울고 싶다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6. 10. 26. 22:50 posted by jenny-come-lately


최순실게이트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참담하고 자괴감이 든다. 매우 슬프다.

이 나라 국민임을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한지 10년이 넘었어도 정치에 대한 한심함과 분노의 정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피와 더불어 밀도까지 높아졌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으로부터 분리독립국가를 선포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부패와 비리를 도려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기지 않았다.

(직권상정 않겠다던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국정원장과 비공개면담을 하고 와서 테방법을 직권상정 했었다.)

야권 정치인들 중에도 국정원장을 독대하고 난 뒤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추측때문이다.


요즘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만일 유기체라면 자살충동이 생길 것이라고 장담한다.


어쩌면 성격장애나 정신질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되는 박근혜의 통치권을 박탈해야 한다.

어차피 그동안 청담동의 일개 아줌마가 나라를 이끌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그 아줌마가 한국에 있지도 않으니

박근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빈 수첩만 멍하니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정신적 충격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사면초가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6. 10. 20. 23:11 posted by jenny-come-lately




한진해운은 무슨 짓을 하고 있고, 우리는 한진해운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2016년 9월 중에 한진해운의 부실 경영 보도에서, 세계적으로 물류량이 줄고 있음에도 

한진해운은 10년이나 되는 장기 용선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선박을 10년 사용하겠다는 임대 개념의 계약을 했을 리가...


그러나 알라딘 서핑을 하다가 주문하게 된 [보물섬]의 초입에 마침 “편의치적”의 개념이 있어서 읽어보고 난 후에 

저 기사를 쓴 기자가 조사를 하지 않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썼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한진해운이 장기 용선 계약을 맺은 이유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나는 자본주의를 극렬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자자본(거의 투기자본이라고 봐야...)과 금융자본을 싫어하고 조세포탈은 증오해서 선택하게 된 책이다. 


책에 안내된 편의치적이란 : 배의 국적이 선주의 국가에 있지 않고 여러 제도 면에서 편리한 나라에 등록되어 있는 선박을 ‘편의치적선’이라 한다.  해운회사는 조세, 행정 절차, 선원법 등의 각종 규제 면에서 편의를 제공하는 나라에 법인을 설립해 선주로 삼고, 그 선박을 용선한다.  파나마, 라이베리아, 바하마, 싱가포르, 비누아투 등이 편의치적국이며, 주로 선진 해운국들이 이를 이용한다. 


이들 지역은 조세피난처와 거의 일치한다.


한진해운의 홈페이지에는 선박들의 제원이 안내되어 있는데, 

사선 37척과 용선 51척 합계 88척의 배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편의치적지가 해외로 되어 있다.  즉, 한국 국적의 배가 하나도 없다

http://www.hanjin.com/hanjin/CUP_HOM_1180.do

용선 51척 중 40척의 delivery는 새누리당 정권시절이다.  사선 37척의 양도가 2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과 비교하면.... 

새누리당 정권은 한국을 말아먹을 심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사.자.방까지...

새누리당 정권초기인 2009년 2척이 이전 정부부터 진행되었다고 감안해도 

2010년부터 2016년까지 39척의 양도가 새누리당 정권시절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단순히 한진해운이 일을 잘해서 운송량이 늘어났기 때문에 배도 많이 도입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 레디앙의 2014년 10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지난 6년간(2008~2013년) 조세회피처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SPC)에 총 6조5천억 원의 외화대출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지난 6년간 산은이 외화대출한 28조8천8백억 원 중 23%에 달하는 금액이다.  21일 새정치민주연합 이상직 의원이 산은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중략) 한진해운은 파나마에 28개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8천6백억 원의 대출을 받았다.” 

http://www.redian.org/archive/79189


고 했는데 수주를 많이 받고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눈 먼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사에서 이상직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책금융기관이 일부 대기업들이 조세피난처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에 대출하는 것이 국제적 금융관행이라 할지라도라고 했으나, 저따위 행위가 관행인것과는 별개로 정상이라고 볼 수 있는 행위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국제적 관행 중에 나쁜 것은 죄다 따라하고 좋은 것은 반대로 행하고 있는 이 정권의.....

국민을 배신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이 새누리당 정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 블로거는 조세피난처에 편의치적을 하는 이유로, 조세회피가 아닌 비용절감과 탈규제를 제시한다.

재무상태, 거래내역을 보고하지 않아도 되고 기항지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고임의 자국 선원을 승선시키지 않아도 된다. 편의치적국은 동록시의 등록세와 매년 징수하는 소액의 톤세 외에 선주의 소득에 대해 일체의 조세를 징수하지 않는다. 금융기관이 선백에 대한 유치권 행사를 용이하게 할 수 있어 선박의 건조 또는 구입자금을 국제금융시장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다. 편의치적국은 선박의 운항 및 안전기준 등에 대해 규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문에서 비용의 절감을 기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lzV&articleno=16220817&categoryId=327547&regdt=20130528175905

라며 옹호한다.  탈규제와 비용절감을 위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지 다 써놓고도 마음에 와 닿는게 없는 모양이다.

더불어, 편의치적 이유를 읽어보면 굳이 조세회피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무능한 회사라면 기꺼이 이용할 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선박을 도입하기 위해 국내의 안전제도와 행정, 관리제도에 따를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선이 된 37척의 배 중 한 척도 한국 국적으로 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역시 오로지 비용 때문일까.


바로 그 비용 절감 때문에 안전 문제와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 

20년 전의 미국 한 기독교매체(?)의 기사(When Choosing Flags, Many Ship Fleets Seek Lax Rules, Low Wages)에 따르면, 

미국 해운국(? the US Bureau of Shipping)의 Bob Veno 는 말하길 당시(1996년 4월 24일 기사)로써 최근 

실시한 한 척의 편의치적선의 조사과정에서 선장부터 요리사까지 구명보트를 어떻게 띄우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On one ship we inspected recently," he says, "there was no one from captain to cook who knew how to launch a lifeboat.”  인터넷 상에 날짜가 1996년 4월로 나오는데 기사관련 동영상은 파산때문에 고립된 한진해운 뉴스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다.)

http://www.csmonitor.com/1996/0424/042496.econ.econ.3.html


검색하다가 호주 가디언의 기사를 찾았다.

https://www.theguardian.com/australia-news/2016/sep/29/ship-crew-stranded-in-sydney-as-owners-caught-up-in-globa-bankruptcy-case

호주 가디언은 2016년 9월 29일, 14명의 한진해운 선원들이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는 기사를 냈다.

기사에 따르면 정박고립된 단기간은 일을 안해도 임금지불이 되기때문에 선원들이 별걱정 안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고될 수 뿐이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안전과 관련하여 한 상원의원은 편의치적선 조사에서 선원들에 대한 경력과 복지에 대한 체크가 빈약하게 이루어져 조합이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국제 운송노동자연합 ITF의 호주국내 책임자 Dean Summers는 호주 내수연안무역의 편의치적선에 대한 의존의 잠재적으로 "비참한" 결말을 한진해운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보물섬]은 편의치적선의 위험에 대하여, 2010년 멕시코만 원유 유출로 인한 환경 대재앙을 일으킨 원유 시추선을 예로 들었다.

나도 이 사건에 대하여 2010년 오염면적 확산의 실시간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링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미드 [웨스트 윙]의 각본가인 에런 소킨이 참여한 또 다른 히트 드라마 [뉴스룸]의 인상 깊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소재로까지 쓰였었다.

(사족; 지난 9월 경북지역 지진에 대하여 손석희 사장이 JTBC 뉴스룸을 특보로 발빠르게 전환한 것과 

이 미국드라마 [뉴스룸]에서 ACN의 윌 매커보이가 멕시코만 기름유출 사건을 특보로 전환한 것이 겹쳐 떠오른다.)


쉬핑뉴스넷의 2016년 10월 12일자 기사에, 제2회 한진해운물류대란 법적쟁점 긴급좌담회가 11일 고려대에서 있었다고 한다. 

http://www.shippingnews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11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BBCHP)의 관할권과 관련된 문제도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관련 상황의 문외한으로서 그냥 직관적으로 생각하건대, 현재 한진해운의 문제는 파산이라는 돈문제이므로 

관할권보다는 소유권에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본다. 


한진해운이 10년 장기 용선 계약을 맺은 것과, 단기간에 저 많은 배를 양도받은 것을 함께 고려하면 

그 원인에 대한 타당한 해석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어차피 용선의 선주는 한진의 페이퍼 컴퍼니다. 즉, 1년 계약을 하건 10년 계약을 하건 초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문제는 장기계약이 아니라 한꺼번에 많은 배를 용선 계약 맺은 사실이며

국책은행이 헤프게 그것도 한국에 세금을 내지 않는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에 대출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한진해운 사태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고의부도와 같은 형태라고 봐야한다. 


한진해운을 응급처치해야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불행에 맞닥뜨린 노동자를 보며 참담한 생각이 드는 것은, 

우주에서 가장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갖고 있다는 것과

우리는 생존 경쟁에 내몰려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빼앗긴 상황에 놓여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사면초가의 상태다.  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어서 분노하게 된다.





사형 반대

사회부적응자의 배설 2016. 6. 12. 01:34 posted by jenny-come-lately



자신의 형제자매 중 하나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을 오랫동안 슬퍼해온 친구가 하나 있다.  친구는 그 죽음을 극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분위기 잡히는 상황이 되면 여전히 울먹인다.  이 친구가 하는 말이 형제가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만일 남의 손에 살해당했다면 그 범죄자에게는 사형선고가 마땅하고 그보다 낮은 처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죽음은 인간 거의 전부가 거부하는 운명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자신만큼 혹은 자신의 신체보다 소중한 무엇을 위하여 선택하는 경우와 참기 힘든 고통을 피하려고 선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수명이 다하여 죽음을 수용하는 어느 노인의 평안한 모습 정도가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죽음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태도일 것이며,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지의 공포가 따르는 죽음을 대부분의 사람이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형을 가장 무거운 극형으로 여기고 있다.


친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성립하려면, 친구가 아닌 죽은 형제가 그 살인자의 죽음을 원해야 한다. 

그러나 형제는 이미 죽어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형제의 가족인 친구 자신이 대신 살인자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친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정했다면 결국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신”일 수뿐이 없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로하고 분노를 삭이자는 것뿐이다.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를 정화하고자 사람을 죽이다니 나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매우 야만스럽다고 생각된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온전한 일반인이 사람을 죽일 때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래서 멀쩡했을 때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사람을 죽일 정도의 어떤 부담과 스트레스가 그 자신을 덮치게 되면 그때서야 그 거대한 스트레스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일탈행동을 하게 되고 이럴 경우 사람을 죽이게 될 수 있다. 

즉 나는, 가족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서 그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죽이고 싶어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스트레스를 살인으로 푸는 것은 내게는 여전히 야만스럽게 여겨진다.

‘살인’이 아니라 ‘사형’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 사형은 국가와 제도에 의한 살인이다.


현대사회의 법은 인간 삶의 질서를 위한 것이어서,

질서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해자가 직접 하지 않고 국가의 이름을 빌어 시행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개인적으로 생각하길 상당히 비겁한 장치라고 여긴다.

살인을 하였지만 살인을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서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최면을 걸 수 있다. 


사형제 존속을 주장하는 논거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 세금 절약 :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이없다.  사형수가 몇 명이나 된다고 그 돈이 아깝다니.

- 강력범죄 예방 : 질서를 헤쳤을 때 법에 따라 처벌이 매겨지는 과정이 정의롭고 엄중하다면 강력범죄는 물론 경미한 범죄도 예방할 수 있다.  한국은 성폭력, 공직자 비리, 부유층과 재벌의 탈세 등등의 범죄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으며 솜방망이 처벌로 정의롭지 못하게 그리고 매우 후진적으로 적용된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음주운전 발각되지 않은 것을 자랑한다.  이상하게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법질서를 지키는데 보수적이지 않다.

- 가석방 없는 종신형 수감범죄자의 활동 노출은 피해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 생명형을 대신하여 자유형을 살고 있는 범죄자에게 구속의 범위를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제한해야 한다.  이 외에는 피해자의 미성숙한 인성 혹은 성품에 의한 피해자 스스로의 고통까지 제도가 완벽하게 보살필 수는 없다.


사법제도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해 범죄 행위 제재의 목적으로 형벌을 그 수단으로 이용한다.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체 기능의 정지 외에 철학, 종교, 인간 본질의 문제 등을 포함하며 극히 사적인 문제이다.  이 중에 사형제도는 오로지 물리적인 문제만을 다룬다.  이런식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한낱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죽음을 단순하게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천박함이 널리 공감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탈하고 망가졌을지언정 한 개인의 본질과 철학에 대해 완전히 외면해버린 이 질 낮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인류는, 죽음을 인간의 본질의 일부로 사유하고 철학하는 것이 대중화되는 시점에서야 사형에 대한 옹졸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